“테이블 밑으로 몰래 검지와 엄지를 쥐어봐. 그러면 왼손은 b가 되고 오른손은 d가 되지. 테이블 왼쪽은 자기가 먹을 bread(빵)이고 오른쪽은 drink(물)이야. 그리고 포크는 밖의 것부터 쓰는 것이야.”
J.D 밴스 부통령 후보의 출세작이자 자서전인 ‘힐빌리의 노래’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자서전은 영화로도 제작이 되어 넷플릭스를 통하면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럴듯한 로펌에 인턴으로 취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밴스는 어쩌다 로펌 고위 관계자들과 식사 자리를 갖지만 테이블 매너도 전혀 모르고 와인 종류도 모른다.
해서 비밀리(?)에 인도계 애인 ‘우샤’와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포크 사용법과 ‘좌빵우물’ 등 테이블 메너를 즉석에서 배운다.
밴스를 대하는 로펌 관계자들은 말 그대로 미국 상류층.
마약중독자 어머니를 두고 고민에 빠진 밴스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촌뜨기가 과연 대형 로펌에서 활약을 할 수 있을지 의문에 가득찬 눈길을 보낸다. 물론 예의는 충분히 갖추었다.
밴스를 대하는 이네들은 전형적인 ‘Luxury beliefs’(사치스러운 신념) 인물들이다.
밴스처럼 예일대에서 공부한 롭 핸더슨이 개념화한 ‘Luxury beliefs’를 소유한 인물들은 간단하게 말해 부유하게 자랐고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진보적인 사상으로 무장해서 스스로를 가난하고 못난 자들을 위해 노력하는 계층이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간단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쓰는 ‘강남좌파’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과거 트럼프와 대선에서 붙었을 때 바로 이런 ‘강남좌파’ ‘사치스러운 신념’의 소유자로 인식이 되어 진짜 부자인 트럼프에 밀려 가난한 백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추락하는 아이러니를 겪었다.
그런데 이제 가난한 백인을 대변하는 쇼를 벌인 트럼프보다 더 트럼프적인 인물 밴스가 미국 정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영국을 이슬람 국가로 정의한 밴스 후보의 등장에 전세계가 긴장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비전은 간단하지만 강력하다. 월스트리트가 아닌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것이다. 제한 없는 글로벌 무역을 위해 우리 공급망을 희생하는 일은 끝났다. 이제는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라는 아름다운 라벨을 붙인 제품을 만들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낙점돼 11월 미국 대선에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밴스 오하이오주 연방 상원의원은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리는 공화당 전당대회 사흘째인 17일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그가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임은 물론이고 트럼프주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연설에 다름 아니다.
트럼프로서는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로도 분류되는 오하이오주가 지역구인 그를 내세우면 미시간·위스콘신·펜실베이니아주 등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동시에 민주·공화당 지지세가 엇비슷한 경합주들을 공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밴스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도널드 트럼프와 그의 정책이 부끄럽다고 말하던 그가 어떻게 트럼프의 러닝메이트가 되냐”고 비판한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에서 자유자재로 변신을 거듭하는 밴스 의원의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읽을 수 있다.
밴스 의원은 2016년 대선에 출마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향해 “미국의 히틀러”, “문화적 헤로인”이라고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부었지만 정치에 입문하면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칭송했다. 그는 직접 트럼프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밴스 의원은 한때 재생에너지를 적극 지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금은 앞뒤 설명도 없이 기후위기 음모론자로 바뀌었다.
부통령 후보 밴스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강경한 기후위기 부정론자, 화석연료 찬성론자 중 한 명이다. “기후위기는 일종의 사기이자 음모이다”고 주장해 온 트럼프를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당, JD 밴스 '핵무기를 가진 최초의 이슬람 국가' 발언에 거부감
안젤라 레이너 부총리, 도널드 트럼프 러닝메이트의 “영국이 (이슬람국가라는)정의”에 동의안해>
며칠 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렇게 기사를 시작했다.
밴스 의원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며칠 전 한 행사에서 “핵무기를 차지할 최초의 이슬람교 국가가 어디인지 (친구와) 이야기했다. 이란이 될 수도 있고, 파키스탄이 이미 어느 정도 포함될 수 있다. 결국 노동당이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이 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밴스 의원의 발언은 영국 내 이슬람교를 믿는 인구 증가 추세를 지나치게 과장해 표현한 것은 물론이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이슬람교도는 전체 인구 6700만 명 중 390만 명(5.8%)에 불과하다.
가디언은 밴스 의원의 과거 발언들을 조명하면서 왔다갔다 하는 그의 발언을 꼬집기도 했다.
가디언은 밴스 후보가 한 때 반(反) 트럼프 진영에 있을 때 “트럼프의 이슬람 혐오 수사를 비난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밴스 후보는 2016년 10월 “트럼프는 내가 아끼는 이민자, 무슬림 등을 두렵게 한다. 이 때문에 나는 그를 비난한다”라고 X(옛 트위터)에 올렸다.
밴스 후보의 부인 우샤 밴스는 바로 인도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 흙수저 신화의 교과서 ‘힐빌리의 노래’ 주인공 밴스의 등장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가난은 가풍이나 다름없다. 우리 조상들은 대개 남부의 노예 경제시대에 날품팔이부터 시작하여 소작농과 광부를 거쳐 최근에는 기계공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았다. 미국인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힐빌리, 화이트 트래시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들을 이웃, 친구, 가족이라고 부른다.”
밴스 부통령 후보는 자서전 ‘힐빌리의 노래’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밴스의 이 책은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과거 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꼽히기도 했다.
밴스 의원이 부통령 후보로 지목되자마자 이 책은 미국 아마존 베스트셀러 목록 1위에 올랐다.
뉴욕타임스(NYT)는 출판사 하퍼콜린스가 이미 300만부가 팔린 이 책을 재출간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밴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서전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겠지만 론 하워드 감독이 4년 전에 영화로도 만들었는데 지금도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는 후보 수락연설에서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주를 포함해 미국 모든 구역의 잊힌 지역사회에 있는 여러분에게 약속한다. 나는 내가 어디 출신인지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빈곤 속에 외할아버지·외할머니의 손에 자랐으면서도 자신의 힘으로 대학을 나와 변호사가 된 후 2년 전 상원의원에 당선된 밴스를 부통령 후보에 지명함으로써 트럼프가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서사를 이어갈 후계 구도를 완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밴스는 결국 2028년 11월 대선에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트럼프가 이번에 대선에서 승리하고 임기 4년을 무난하게 마친다는 점을 전제로 하지만.
피격 이후 아직까지는 모든게 트럼프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는 벌써부터 “9월에 금리를 인하하면 안된다”고 주장하거나 “대만은 반도체에서 이득을 보는 것만큼 국방비를 더 지불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데 이에 시장은 즉각 반응하고 있다.
그렇다면 밴스 부통령 후보를 미국 월가에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지난 16일(현지 시각) 마켓워치는 그간 기업 세금 인상과 반독점 규제에 지지 목소리를 내온 밴스가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월가와 재계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고 전했다.
감세와 기업 규제 완화라는 전통적 공화당 정치색이 바뀔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AGF 인베스트먼트의 수석 미국 정책 전략가 그렉 발리어는 전날 고객에게 보낸 메모에서 “워싱턴의 최고 비즈니스 로비스트들은 기업 규제를 지지하고 기업 세금 인상을 고려하려는 밴스의 태도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밴스가 기술 전문 투자자 피터 티엘 밑에서 일하는 등 실리콘 밸리에서 5년 동안 일한 경력이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밴스는 이 기간 동안 티엘, 삭스, 일론 머스크 등 억만장자들과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외신에 따르면 이들이 밴스의 정치적 야심을 금전적으로 뒷받침하고, 다른 부호들을 끌어들이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홍보하고, 트럼프에게 러닝메이트로 선정하도록 로비했다고 전했다.
그러니 기업을 바라보는 밴스의 시각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지금 가늠하기 어렵다.
밴스 부통령 후보는 언제나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온 인물임을 다시 상기할 필요도 있다.
흙수저 출신으로 당연히 거대 자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보유하고 있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말을 바꿀 수 있다는 이미지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를 보면 유색인종이 아주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처음 밴스가 어머니의 구타에서 벗어나 도망을 갈 때 그를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경찰이 흑인이다. 그리고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려 할 때 만난 간호사가 흑인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다른 남자를 만나 두 집 식구들이 합치기도 하는데 그때 어머니가 만난 다른 남자는 동양계이다.
이처럼 밴스는 다른 유색인종을 만날 기회는 아주 적었고 가난한 백인들 틈바구니에서 성장했다.
물론 밴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유색인종이 한명 등장한다. 바로 부인인 우샤이다. 밴스에게 포크 사용법을 가르친 바 있는 우샤는 인도계 엘리트로 밴스와 예일대 법학대학원 동기이다.
흙수저 출신인 우샤는 밴스의 백인 위주의 편협한 이미지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 점은 트럼프보다 오히려 유리하다.
만약 바이든 대신 유색인종인 카밀라 해리스가 민주당 후보로 나온다고 해도 밴스의 부인 우샤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미국 공화당의 차차기 대선 후보로 유력하게 등장하고 있는 밴스 부통령 후보가 트럼프와 같은 ‘가짜 힐빌리’가 아니라 ‘진짜 힐빌리’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밴스는 포크 사용법도 모르던 흙수저 출신이다. 앞으로 그를 평가할 때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33분 동안 이어진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밴스는 ‘노동자 계급(working class)’을 다섯 차례나 언급했다.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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