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는 물론이고 국내외 북한 전문가들은 지난 8일 김일성 사망 30주기를 맞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할 것인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김일성의 생일을 맞아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을 2년 연속 찾지 않았고, 김정일의 생일인 지난 2월 16일(광명성절)에도 3년 연속으로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4월 태양절 참배를 건너뛴 것처럼 사망 30주기도 무시한다면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우상화에 돌입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동지께서 참가자들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입상을 우러러 숭고한 경의를 표시하셨다”고 보도했다.
결국 김정은 위원장은 나라 안팎에서 김정은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뛰어넘는 우상화 작업에 들어갔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금수산태양궁전에 참배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북한이 김정은 개인 우상화에 열을 올려온 것은 사실이다.
최근 북한은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의 얼굴만 새긴 배지(초상휘장)를 처음 공개했다.
북한이 민족 최대 명절로 기념해 온 4월 15일 태양절(김일성 생일)의 명칭이 바뀐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북한은 올해는 '태양절'이 아닌 '4·15' 또는 그냥 ‘명절’로 불렀다. 김일성이 곧 ‘민족의 태양’이라는 개념을 바꿔가기 시작한 것이다.
◇'위기의 북한 경제' 김정은 개인 우상화에 제동 거나
이같은 상황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김일성 사망 30주기 행사에 참석한 것은 김정은 개인 우상화 작업의 속도 조절에 나선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최근 들어 더욱 악화되고 있는 북한 경제의 속사정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경제가 쉽게 회복하지 않는 이상 김정은으로서는 계속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후광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 당국이 환율을 잡기 위해서 개인 간 외화 거래를 통제하고 있지만 환율 급등세를 막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국경을 봉쇄한 이후 환율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이 지난해 8월부터 개인 간 외환 거래에 대한 규제를 계속해 왔음에도 북한의 원·달러 환율이 올 초 1만원 안팎에서 꾸준히 올라 이번 달 1만5000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소식이다.
북한 전문매체인 데일리NK에 따르면 한 달 사이 환율이 무려 59%나 폭등했다. 치솟는 환율은 북한 물가를 크게 자극하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에 따르면 지난 4월 초 평안남도 은산군 장마당에서 무연탄은 1t에 15만원, 돼지고기 1㎏은 2만3000원에 판매됐지만 5월 중순 이후 무연탄 1t이 28만원, 돼지고기 1㎏은 3만원에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물가가 초급등세를 보이고 있는데 환율이 오르면서 7월에는 더 큰 폭으로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당국이 인심을 얻기 위해 노동자 임금을 올린 것도 물가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평안남도의 한 소식통(신변안전 위해 익명요청)은 자유아시아방송에 “지난 4월부터 공장 노동자의 월급이 공식적으로 인상(2300원에서 5만원)되면서 달라진 것은 장마당 물가가 오른 것”이라고 전했다.
소식통은 이어 “지난 4월부터 공장 노동자 월급이 20배 인상돼 국돈(북한 원화)이 많아지자 길거리에서 대중이 사먹는 두부밥 한 개 가격이 250원에서 350원으로 올랐다”며 “일부 주민들은 앞으로 식량과 생필품 가격이 더 오를 수 있다며 사재기에 나서기도 한다”고 현지 실상을 전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경제를 총괄하는 재정상 자리를 고정범에서 리명국으로 최근 전격 교체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정범 전 재정상은 지난 1월을 마지막으로 공개 석상에 등장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처형설 등 여러 소문이 나돌고 있지만 진상은 아직 모른다.
북한에서 재정상 자리는 사실 중요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위치이다.
지난 2020년에도 경제위기 때문에 기광호 당시 재정상을 전격 해임했다. 기광호는 해임되기 전에는 무려 5년간이나 그 자리를 유지했었고, 고정범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가 4년만에 해임된 것이다.
북·중관계 경색으로 물자수입이 감소해 민생고가 가중되고 있다는 분석인데 북·러관계가 깊어지면서 중국과의 경제교류는 앞으로 더욱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중국이 10만명가량으로 추산되는 중국 내 북한 노동자들에게 일괄 귀국을 요구했다고 한다.
중국이 기존 북한 노동자의 체류 기간 연장을 불허하고 신규 노동자 파견에 필요한 비자 발급 등을 제한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중국에 있는 북한 노동자들이 대규모 귀국하면 북한 외화벌이에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
중국이 이처럼 북한에 강공책으로 나오는 것은 북·러가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신냉전 수준으로 회귀하는 조약까지 체결하자 북한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기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같은 북·중 긴장관계는 지난 11일 평양에서 중국측 주최로 열린 북한과 중국의 우호조약 체결 63주년을 기념하는 연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이 마련한 연회에는 조중(북중)친선의원단 위원장인 김승찬 김일성종합대학 총장과 관계 부문 간부들이 초대됐다.
그간 중국대사관이 우호조약 체결을 기념해 평양에서 개최하는 연회에는 주로 남측의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참석해왔으나, 올해는 소원해진 양국 관계를 반영하듯 참석자의 급이 낮아진 것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북중 우호조약 체결 63주년인 전날 양국 관계를 다루는 기사를 예년과 달리 한 건도 싣지 않은 것에서 우리는 두 나라의 긴장관계를 읽을 수 있다.
북러 정상회담 직후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18∼19일 북한 방문과 관련, “푸틴 대통령이 24년 만에 북한을 방문하게 됨으로써 러시아와 북한의 군사 관계가 과열되고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이 신문은 “이번 방북으로 러시아와 북한이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수준의 긴밀한 군사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될까 걱정스럽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북한 경제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국내외 사정도 복잡해지자 김정은 우상화 작업에 열을 올리던 북한 당국으로서는 속도 조절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분명한 것 같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김정은 집권 전반 5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2%로서 소폭이나마 성장한 반면, 2017~22년 6년간은 –2%였다. 최근 3년은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였다고 한다.
경제 제재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2016년 북한 무역은 65억3169만달러였으나, 2021년 에는 무려 10분의 1로 줄어든 7억1333만달러에 불과했다.
◇ 우크라이나 전쟁 끝나면 러시아 입장에서 북한과의 관계는 오히려 부담으로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평양 방문에서 합의한 ‘포괄적인 전략적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에 이어 가장 가까운 이웃 국가 중 하나와 가능한 모든 분야에서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고 심화시킬 것”이라고 밝혔다고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이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런데 여기서 러시아 대변인이 말한 “모든 분야에서 협력”에서 경제분야는 빠졌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6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우크라이나 파병을 요구했지만 김 위원장은 확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사실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무릅쓰면서 러시아와 밀착하는데는 단순한 군사 협력에 대한 기대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경제 분야에서 중국이 그동안 북한에 해 온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푸틴 대통령은 작년부터 ‘시베리아의 힘 2’ 건설 프로젝트 합의를 위해 공을 들여왔다.
지난해 3월 시진핑 중국 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에도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시베리아의 힘 2 가스관 건설에 합의했으며 프로젝트와 관련된 여러 변수에 대한 협의도 끝났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하지만 이후 나온 공동성명에는 “이 프로젝트를 계속 연구하고 협의한다”는 내용만 담겼다. 푸틴 대통령의 희망과 달리 가스관 건설 비용 분담, 가스 공급가격을 둘러싼 이견이 해소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을 종합해보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북한 무기도 급하지만 당장 중국과의 관계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북한에 대해 군사기술 협력관계 이상의 경제적 당근을 주기에는 능력도 부족하고 어려움이 많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까워진 북한과 러시아 관계는 만약 전쟁이 끝나면 특히 러시아 입장에선 북한의 필요성이 급격히 줄어드는 대신 전후 복구를 위해 한국, 일본 등 서방과의 관계 개선이 더 급해질 수도 있다.
지금처럼 북한 경제가 계속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북한의 입장에서도 무조건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에만 집중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워싱턴 선언’ 이후의 확장 억제에 관한 한미 안보협력 진전을 재확인하면서 ‘핵억제 작전 지침을 승인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북한이 핵무기로 도발할 경우 미국의 핵무기로 보복한다는 내용이다. 미국 핵 자산을 북핵 대응 용도로 문서에 명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이같은 우방국과의 협력관계 강화도 중요하지만 중국, 러시아, 북한 사이의 복잡미묘한 관계의 틈을 활용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에서 ‘강대강’의 경직된 전략에서 벗어난 보다 유연한 접근방법이 병행될 필요도 있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누가 승리를 외치든 어쨌든 끝날 것이고 우리로서는 전쟁 이후 정세 변화까지 내다보는 빈틈없는 전략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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