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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엘앤에프 교환사채 헐값 매각…해외투자자 손절매 강행

- 엘앤에프 주가 80% 이상 하락
- 해외 투자자, EB 원금 대비 67% 손절매.
- 최대주주인 GS家 4세 허제홍 회장, 장내 매수 중

엘앤에프 사옥

 

[편집자주] 기업의 위험징후를 사전에 알아내거나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용이 어렵거나 충분하지 않다면 호재와 악재를 구분하기 조차 어렵다. 일부 뉴스는 숫자에 매몰돼 분칠되며 시장 정보를 왜곡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현미경으로 봐야 할 것을 망원경으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치다. ‘현미경’ 코너는 기업의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점검하며 특정 동선에 담긴 의미를 자세히 되짚어 본다.

뉴스웨이브 = 이태희 기자

전기차 시장 ‘캐즘’(일시적 수요 후퇴) 장기화로 2차 전지 관련 업체들이 극심한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가운데, 국내 대표적 2차 전지 소재업체 중 하나인 엘앤에프의 교환사채(EB)에 투자했던 일부 해외 투자자들이 작년 말 투자 원금의 상당 수준 손실을 감수하고 원금 일부를 급하게 회수해간 것으로 밝혀졌다.

EB는 특정 시점이 되면 발행 회사가 보유한 상장 주식과 맞교환할 권리를 주는 회사채다. 해당 상장 주식 주가가 교환가액 이상으로 오르면 맞교환해 팔아 주가차익을 올릴 수도 있고, 교환하지 않더라도 만기까지 들고 있으면 이자 포함, 최소 원금 이상은 보통 되찾을 수 있다.

이 EB는 또 발행 5년 후인 2028년 4월부터 조기상환청구권(풋옵션)도 있어 앞으로 3년만 더 기다려도 원금 이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보유 2년도 안돼 원금까지 손해 보며 사실상 손절매를 강행한 것이다.

그만큼 일부 해외 투자자들이 엘앤에프나 2차전지 소재 업체들의 미래까지 부정적으로 보고있다는 시그널도 될 수 있어 주목된다.

 

엘앤에프의 해외 EB 만기전 조기재매입 관련 공시

 

5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엘앤에프는 2023년 4월26일 발행했던 사모 해외 외화교환사채 5억달러(원화기준 6629억원) 중 1.2억달러(1720억원)를 작년 12월13일(지급일 기준) 만기 전 취득했다고 작년 말 공시했다.

엘앤에프가 원금에 이자까지 더해 사들인 금액은 1158억원으로, 취득대상 EB의 장부가 1720억원에 비해 67% 할인된 금액이라고 엘앤에프 측은 설명했다.

이 EB는 싱가포르 거래소에 상장돼 있던 것으로, 엘앤에프가 장외 공개매수 형태로 재매입했다. 싱가포르 거래소 및 블룸버거를 통해 EB 매입 계획을 공시한 뒤, EB 보유자(사채권자)들로부터 매도 청약을 접수받아 엘앤에프가 취득 금액 및 취득 대상 EB 금액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취득 거래 주간사는 JP모건이 맡았다.

엘앤에프는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만기 전 취득을 했으며, 취득 EB는 모두 소각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할인된 가격으로 재매입을 했기 때문에 회사는 상환이익을 봤다고도 밝혔다.

이 EB의 만기는 2030년 4월26일이고, 그때까지 보유하면 원금에 2.5%의 이자까지 받을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다. 또 발행 5년 후인 2028년 4월26일부터는 풋옵션 행사가 가능하다. 풋옵션을 행사해도 원금을 찾아갈 수 있다.

2차전지 시장 전망이 상당히 밝을 때 발행했던 첫 해외 EB여서, 발행 당시만 해도 엘앤에프가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해외에서 할증 발행에 성공했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교환대상 주식은 엘앤에프 주식 36만3122주(지분율 1%)로, 발행 당시 교환가액은 330.466973달러(현 환율로 43만8100원)로 설정됐다. 엘앤에프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교환 청구기간은 2023년 6월6일부터 2030년 4월16일까지로 되어있다.

하지만 2023년 6월7일 종가가 27만9000원으로 하락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주가는 계속 떨어져 지난 3일 종가는 79900원에 불과하다. 교환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EB의 발행조건들

 

엘앤에프 측이 이번에 EB를 조기 매각한 투자자들의 국적 등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싱가포르거래소 상장 EB 보유자들인 걸로 보아 국내보다는 해외 투자자들이 많을 걸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일부 해외 투자자들이 원금보다 33% 손해 본 가격으로 EB를 되팔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주가가 한참 떨어진 후 싱가포르 시장에서 원금보다 싼값으로 EB를 매입했다면 헐값 처분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발행 초부터 EB를 갖고있던 투자자가 최근 팔았다면 분명 헐값 매각이다. 또 아무리 시장에서 싼 값에 매입한 투자자이더라도 풋옵션 때까지 들고 있으면 매입 가격보다 더 많은 원금을 건질 수 있다.

IB업계의 한 관계자는 “교환으로 주가차익을 못 올리거나 시장에서 싼 가격에 매입했더라도 3년 후면 풋옵션 행사로 적어도 원금은 확보할 수 있는데, 이렇게 헐값으로 서둘러 팔아치운다는 것은 분명 이례적”이라며 “다른 어떤 곡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부 해외 투자자들이 회사의 원금 상환능력 자체에 의문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냐고 생각해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엘앤에프 측은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한 반박에서 “EB가 거래소에 상장돼 있어 가격이 주식처럼 유동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주가 하락으로 EB 시장가도 많이 떨어져 있어 발행가 대비 할인 매각했다고 해서 큰 손실을 보고 팔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고 해명했다. 회사 재무상태 등과도 아무 관련이 없다고 적극 반박했다.

엘앤에프의 작년 잠정 영업실적(연결기준) 공시

 

한편 엘앤에프는 다른 2차전지 소재 업체들처럼 작년 참담한 영업실적을 최근 공시한 바 있다. 작년 연결기준 매출은 1조9075억원으로, 전년 4조6441억원 대비 절반 밑으로 크게 줄었고, 영업손실도 5102억원으로, 전년 2223억원보다 2배 이상 급증했다. 당기순손실도 2023년 1949억원에서 작년 3675억원으로 88%나 늘었다.

때문에 사업이나 투자 확장보다 몸집을 줄이고, 재무구조를 개선, 최대한 오래 버티는데 현재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만기나 풋옵션 요구가 돌아오는 채권은 더 좋은(회사 입장에서는 더 나쁜) 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일단 새 채권으로 바꿔주고 있다.

일례로 2021년 사모펀드 IMM크레딧솔루션이 인수했던 사모 전환사채(CB) 1천억원의 경우 지난 1월 일단 회수하고, 더 좋은 조건의 새 전환사채 1천억원으로 곧 바로 바꿔 주었다. 2023년 말부터 풋옵션이 발동되던 CB다.

옛 CB의 전환가액은 주당 17만7462원였던데 비해 새 CB는 10만3974원으로, 크게 낮아졌다. 1년 후인 2026년 1월부터 전환이 가능하다. 새 CB의 만기는 2030년 1월로, 만기까지 갖고 있으면 복리 만기보장수익률로 원금의 110.4895%를 일시 지급하는 만기상환 조건이다. 종전 CB는 만기 보유시 만기 이자율 0에 원금 100%만 일시 상환하는 조건이었다.

새 CB의 풋옵션은 당장 3개월 후인 오는 4월10일부터 발동 가능하다. 조기상환수익률은 연 2%로, 3개월마다 복리계산된다. 시간이 갈수록 조기상환 이자가 더 비싸지는데도 일단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고서라도 사실상 만기 연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새 CB의 발행조건들

 



작년 8월에는 투자 효율화 차원에서 구지 3공장 신규 증설 투자자금을 종전 6500억원에서 5883억원으로 축소 조정하기도 했다.

엘앤에프는 2023년 초까지만 해도 국내 순수자본 기업 최초로 안전성이 탁월하고 가격이 저렴하지만 개발 및 양산이 매우 어려운 니켈복합계의 양산기술 개발에 성공, 리튬이온 2차전지산업의 변화를 주도하는 세계적 수준의 양극소재 전문업체라고 스스로 자랑하던 회사다.

하지만 2023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전기차 ‘캐즘’이 몰아치면서 이 회사도 실적 추락과 재무악화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엘앤에프의 주요 주주 현황

 

최대주주는 전자부품업체 새로닉스(지분율 14.29%) 이지만 새로닉스의 최대주주인 GS그룹 허씨 가문 4세 허제홍 이사회 의장이 사실상의 최대주주다. 허 의장의 할아버지가 허만정 GS 창업주의 차남인 고 허학구 전 새로닉스 회장이고, 아버지인 고 허전수씨도 새로닉스 회장을 역임했다.

허학구 가문은 오래전부터 GS그룹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LCD TV 등의 부품 제조판매업체인 새로닉스와 광성전자 등을 설립, 독립경영을 해왔다. 하지만 새로닉스도 현재 적자 상태여서 그룹 전체 상황이 좋지 않은 편이다.

허제홍 회장은 작년부터 주가가 많이 떨어질 때마다 최수안 대표이사와 함께 엘앤에프 주식을 조금씩 계속 장내 매수하고 있다. 최대주주부터가 앞장 서 주가를 부양하고 책임경영을 하고 있다는 시그널을 시장에 주려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