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문민정부에서 총무처 장관으로 재직하던 서석재는 출입기자들과 저녁 자리를 하면서 비보도를 전제로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이 4000억원대의 비자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을 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인지,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석재 장관은 저녁 자리가 끝날 때쯤 모 신문의 출입기자를 보면서 “아무래도 당신이 오프더레코드를 깰 것 같은데 그러면 안되요. 소문일 뿐이야”고 어깨를 치면서 웃었다고 한다. 뭔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면서...
서석재 장관의 예지력(?)이 통한 것인가. 서 장관이 지목했던 바로 그 기자가 ‘전직 대통령 거액 차명계좌설’을 신문 톱으로 기사를 썼다.
바로 난리가 난 것은 물론인데, 붙똥이 튄 것은 정치권만은 아니었다.
기사의 소스가 된 서 장관과의 저녁 자리에 참석했던 경쟁사 기자들은 말 그대로 회사에서 치도곤을 당했다.
보도 이후 한바탕 법석이 전개된 뒤 1995년 10월 19일 국회 본회의장 대정부질의 시간에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4000억원을 이원조씨가 시중 은행에 분산 예치했다고 증거까지 제시하면서 폭로했다.
노태우의 비자금 사건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같은해 10월 27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5년간 5000억원 가량의 통치자금을 조성했다”고 실토했다.
여기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 말은 바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용한 ‘통치자금’이라는 용어였다.
‘통치자금’이라.
20세기 끝자락에 그것도 문민정부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그런 시절에 아무리 군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전직 대통령이 ‘통치자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같은 해 11월 구속이 되었는데 40여개 대기업으로부터 적게는 50억원에서 많게는 350억원까지 통치자금(?)을 수수한 것으로 나왔다.
◇‘노태우 통치자금’...노소영에 1.4조 잭팟, SK는 혼돈으로 밀어넣어
최태원 SK그릅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과 관련해 2022년에 열린 1심에서는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위자료 1억원과 재산분할로 665억원 및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시중에서는 재산이 국내 최상위급이고 귀책 사유도 있는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지불하는 보상액수가 너무 작다는 평판이 많았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지난해 하반기 언제쯤인가. 금융권의 전직 고위 인사들과 저녁 자리를 하는 자리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최태원 노소영 이혼 소송을 담당하는 2심 재판부가 1심 판결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은 물론 공중전까지 겪은 전직 고위 인사들의 전언이기에 그냥 흘려듣을 수는 없었다.
이네들은 그때부터 “뭔가 파격적인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나는 “그렇다고 해서 정경유착을 당연시하고 노소영에게 조단위의 혜택을 안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텐데”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지난 30일 2심 법원 판결은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서울고법 가사2부(재판장 김시철 부장판사, 김옥곤·이동현 고법판사)는 이들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위자료 20억원을, 재산분할로 1조3808억17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위자료와 재산 분할액을 대폭 늘렸는데 특히 SK 주식은 재산분할 대상이 아니라는 1심 판단을 뒤집었다.
고법 재판부는 두 사람의 합계 재산을 약 4조원으로 보고 분할 비율을 최 회장 65%, 노 관장 35%로 정했다.
또 1조3808억원에 달하는 재산분할 액수를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현금으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물론 최 회장 측은 즉각 상고의 뜻을 밝혔다.
1심은 “SK㈜ 주식은 최 회장 부친인 최종현 전 회장에게 물려받은 특유재산”이란 최 회장 주장을 받아들였다.
특유재산은 결혼 전부터 가진 고유재산 등으로, 보통은 이혼 시 분할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노 관장은 1990년대에 부친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증권사 인수, SK 주식 매입 등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50억원짜리 약속어음 6장의 사진을 재판부에 제출했는데 재판부가 이를 인정한게 이번 판결의 결정타였다.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씨가 작성한 메모에도 ‘선경 300억’이 들어가 있다”며 “태평양증권 인수 당시 출처 확인이 어려운 규모의 돈이 유입된 것을 보면 노 전 대통령 측이 금전적 지원을 하고 받은 증빙 어음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같은 언급은 재판부의 판결문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설득력이 있다”고 했지 “사실임에 틀림없다”고는 하지 못한 것이다.
누군가의 메모에 ‘300억원’이라는 액수가 적혀있다고 해서 수십년 뒤에 이를 근거로 채권이 발생할 수 있는지는 의구심을 가질만 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SK에 유입되었다면 그것 자체가 불법이고, 때문에 노소영 관장이 그 재산을 물려받는 것은 불법이라는 비판이 나올 것을 미리 예견(?)한 것인지 재판부는 친절하게도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1991년도 기준으로 볼 때 300억원이 (분할 대상에 포함시킬 수 없을 만큼의) 불법적인 돈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이 300억원은 노 전 대통령의 앞선 형사 재판에서 인정된 비자금과는 별개의 돈이라는 설명이다. 불법적으로 조성된 돈일 수 있지만 재산분할을 방해할 정도의 불법은 아니라고?
재판부는 또 최종현 선대 회장의 태평양증권·한국이동통신 인수 등을 들어 “SK는 노 대통령과의 사돈 관계를 보호막, 방패막으로 해서 위험한 경영을 감행해 그동안 성공해 왔다”며 “돈세탁이라고 의심할 만한 정황이 드러났지만 국세청 등을 통한 자금 출처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재판부는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오늘의 SK를 만들었다고 판결을 내린 셈인데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비자금을 변명하기 위해 사용한 ‘통치자금’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임을 이번 재판부가 확인해준 셈이다.
노 전대통령은 “나라를 걱정하고 경제를 살리는데 쓸 돈이다”는 뜻으로 ‘통치자금’이라는 표현을 썼으니...
반면 최 회장 측은 “SK그룹에 비자금이 유입된 적이 없고 이는 1995년 노 전 대통령 수사 때도 확인됐다”고 반박했다.
최 회장측은 또 “노태우 정부 당시 압도적인 점수로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따고도 정부의 압력 때문에 일주일 만에 사업권을 반납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직접 경험한 일이기도 하다”고 정경유착을 부인했다.
지난 3일 SK수펙스추구협의회에 참석한 관계자들은 또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어렵게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는데, 마치 정경유착이나 부정한 자금으로 SK가 성장한 것처럼 곡해한 법원 판단에 참담한 심정”이라며 앞으로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결연히 대처키로 했다고 한다.
이번 재판부의 판결은 또 하나 이상한 결론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수 십년간 SK 그룹에서 일해온, 말 그대로 수십만명의 임직원들이 이뤄낸 성과는 오로지 노태우 비자금 300억원 때문에 가능했다는 결론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노태우 집안의 300억원 비자금을 종잣돈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거대 기업의 지분을 ‘재산 형성 기여’라는 이유로 노 관장이 모두 가져가는 게 맞냐는 의문 제기 역시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도 부의 대물림을 막기 위해 최고 60%를 육박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율을 인정하는데 노 관장은 부친이 300억원을 SK에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조 단위의 현금을 쥐게 된다. 아무런 상속세도 없음은 물론이다.
SK를 “우리 회사”라고 입에 달고 다니던 임직원들의 입장에서는 이번 사태가 어떻게 보여질지...
◇'소버린 사태' 재조명...경영권 방어는 물론 경쟁업체 도전 극복도 숙제
이번 판결로 21년 전 SK그룹이 겪었던 '소버린 사태'가 재조명되고 있다. 소버린 사태는 SK그룹이 외국계 자산운용사인 소버린으로부터 적대적 인수합병(M&A)를 당할 뻔한 사건을 말한다.
국내에서 장하성, 김상조 등 참여연대 소속 사람들은 소버린에 적극 동조해 소버린이 마치 국내 재벌기업들을 개혁하는 수호신처럼 대접을 해주었다.
하지만 소버린은 1768억원을 투자해서 주식매각 차익 9300억원 외에 환차익까지 포함하면 대략 1조원의 수익을 올리고 유유히 한국 시장을 떠났다.
2심 판결 이후 주식시장에서 SK 주식은 연일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다. 최근 판결의 후폭풍으로 제2의 소버린이 등장할 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내홍을 겪고 있는 SK그룹이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계속 확보하는데도 비상이 걸렸다.
HBM 분야에서 SK하이닉스와 경쟁중인 마이크론은 물론 배터리 분야에서 SK 최대 경쟁업체인 CATL 역시 콧노래를 부를 판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지난 4일 대만 타이베이 그랜드 하이라이 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곳은 모두 HBM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라며 “우리도 그들이(삼성전자, 마이크론) 최대한 빨리 테스트를 통과해 우리의 AI 반도체 공정에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SK하이닉스 출신 전직 기술자들이 마이크론으로 이직해 기술 유출이 염려되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물론 마이크론의 도전이 거세지고 있다.
하지만 노태우 통치자금이 모든 공을 앗아가는 상황에서 SK하이닉스 직원들의 충성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SK그룹은 연초부터 배터리 사업을 하는 SK온 등을 중심으로 한 사업 재조정 작업을 진행해왔는데, 이번 판결로 그같은 작업에 변수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최근 경쟁업체인 중국의 CATL(닝더스다이, 寧德時代)이 테슬라와 공동으로 초고속 충전 2차전지를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등 세계 시장의 움직임은 심상치가 않다.
SK그룹은 그룹 성장사 자체를 부인하는 부정적인 여론은 물론 이를 틈탄 외부 세력의 공세에도 대비를 해야 하고, 무엇보다 최 회장 본인이 천문학적인 재산 분할에 대응하면서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냐를 두고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세계 반도체 전쟁이나 전기차 배터리 전쟁에서 SK그룹의 혁신 모습을 계속 발견할 수 있을지 그게 문제이다.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게이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스웨이브][저축은행 리스크 점검]①안국, 부실성채권 30% 육박 '전국 최고' (1) | 2024.06.05 |
---|---|
[뉴스웨이브][게이트]"兆단위 매출에 남는건 없어" 한진, ROE 추락 (0) | 2024.06.05 |
[뉴스웨이브][게이트]한국투자파트너스, 영상 분석 AI 스타트업 '트웰브랩스' 추가 투자 (0) | 2024.06.05 |
[뉴스웨이브][게이트]SK트리켐, 단기차입금·이자 부담 가중…‘급전 조달’ (1) | 2024.06.04 |
[뉴스웨이브][게이트]매일헬스뉴트리션, CEO 교체 카드에도 ‘적자 폭 확대’ (1) | 2024.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