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소니는 물론 음주운전 의혹에 휩싸인 트로트 가수 김호중이 18, 19일 이틀 연속 공연을 강행했다.
며칠째 김호중 관련 뉴스가 정치권 뉴스를 밀어낼 정도로 인터넷 공간을 도배하고 있는 가운데 김호중은 경남 창원 스포츠파크 실내체육관에서 '트바로티 클래식 아레나 투어' 공연을 화려하게 진행했다.
김호중이 아무리 대형 스캔들에 휘말려도 그를 응원하는 수 천명의 팬들이 몰려 장사진을 이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호중은 경찰에 입건된 뒤 처음 연 창원 콘서트에서 “모든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면서 팬들을 향해 자기의 결백을 직접 호소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일부 팬들은 “이럴수록 우리가 더 뭉쳐 힘들어하고 있을 김호중을 무조건 응원해줘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연장 주변 주차장은 서울, 경기와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팬들이 타고 온 관광버스로 가득 찼고 김호중 팬덤 색깔인 보라색 옷을 입고 공연장 인근에 마련된 포토존에서 50대 이상 중장년층 여성팬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풍경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호중은 이틀 동안 공연을 강행했지만 결국 19일 늦게 음주운전을 실토하고 용서를 구했다.
관련 뉴스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와중에도 김호중의 공연이 이틀이나 진행되는 풍경을 우리가 어찌 예사롭게 넘길 수 있을 것인가.
◇덕질, 팬덤 문화는 연예인에게 해방구인가 또 다른 감옥인가
오래 전부터 연예계에서 유행하는 말중 하나가 ‘덕질’이다.
뭔가에 빠져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덕후’라고 하는데, 그런 덕후들이 열정을 넘어서 직접적으로 그 대상에 몰입하고 사랑하고 수집하는 행위를 ‘덕질’이라고 한다.
덕질은 곧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 강력한 사회 현상이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 권력화하기도 한다.
K팝 선두주자 방탄소년단(BTS)를 덕질하는 팬클럽 ARMY(아미)는 이미 사회적인 현상이 되어 세계적인 차원에서 연구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미는 자신들의 행위를 ‘덕질’로 묘사하는 것 자체에 물론 강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덕질’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건강한 팬심(心)’으로 표현해도 좋다.
강력한 팬덤 문화가 21세기 소외(疏外)가 만연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하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과도한 애정은 그 대상을 옥죄기도 한다.
4세대 걸그룹 대표 주자인 에스파의 카리나는 지난 3월 SNS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연애사에 대해 장문의 자필 사과 편지를 올렸고, 이게 외신에까지 보도되는 일이 있었다.
카리나가 동료 연예인 이재욱과 연애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부 극성팬들이 비난을 퍼부었고 인기 하락에 위기감을 느낀 카리나가 “성급하게 연애를 하고 그 사실을 공개했다”고 팬들에게 사과를 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아이돌의 남자친구는 음식점의 바퀴벌레와 같다”라는 글이 올라와 많은 공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해외 팬들은 SNS X에 “K팝 팬들은 사생활에 대한 의식이 없다” “한국에선 젊은 연예인이 사랑을 하는 것에 대해 사과를 한다”는 반박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 또한 무척 기이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연예계는 물론 정치권에 형성된 팬덤문화에서도 옥석가리기가 필요하다
이처럼 팬덤 문화는 지지하는 연예인들을 후원하기도 하고 옥죄기도 하면서 아주 강력한 이익집단이 되고 있다.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더 심하게 덕질문화, 팬덤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여야 정치 지도자 모두 강력한 팬덤층을 기반으로 정치력을 구사하고 있다. 문제는 팬덤층이 강력해지면서 이제부터는 K팝 스타 카리나처럼 정치지도자가 열렬 지지층을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치를 보는 퇴행적(退行的)인 정치문화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인기를 좇아 대중을 동원하여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태도나 경향을 ‘대중추수주의’(大衆追隨主義)라고 하는데 사실 이런 정치적 경향이 형성된 것은 오래되었고 다만 그같은 현상이 최근 한국 정치에서는 지배적인 경향이 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총선에서 크게 패한 국민의힘에서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한동훈에 대한 책임론을 두고 공방이 치열한데, 현재 분위기로는 그가 당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비록 총선에서는 대패했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바로 ‘한동훈 팬덤층’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보수정당에서는 아주 보기 힘든 팬덤층이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이재명 당대표가 아무리 많은 사법리스크에 시달려도 ‘개딸’로 불리는 팬덤 지지층이 있었기에 지금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가 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 역시 처음 창당을 할 때 정치전문가들은 긴가민가 했는데 창립대회 자체를 수천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에서 했을 정도로 대체불가의 팬덤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팬덤층의 도움을 받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지지자들만 바라보는 정치는 우리 정치를 더욱 퇴행(退行)시키는 것이기에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추미애 당선자를 꺾고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로 지난 16일 선출된 결과를 두고 당내 후폭풍이 거세지고 있다.
이른바 ‘개딸’들이 열렬히 후원한 것으로 알려진 추미애의 탈락 이후 일부 당원들이 “탈당하겠다”며 게시판을 도배하고 있고 친명계 정청래 최고위원은 “국회의장 선거 결과로 많은 당원과 지지자들이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다. 상처받은 여러분께 미안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재명 대표의 뜻이 바로 당원들 또는 의원들의 뜻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분위기 때문에 일부 석간에서는 마감시간에 쫒겨 “추미애 당선”으로 신문을 찍어내기도 했다.
괴이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기자는 우원식 추미애 누구를 지지하는 그런 입장이 아니라 당내 민주주의를 믿는 입장에서 이번 우원식의 국회의장 후보 당선을 보면서 더불어민주당의 당내 민주주의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았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거대 팬덤의 분위기와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무슨 선거이든 결과를 정확하게 맞춘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행한 일이다. 대부분 여론조사와 선거결과가 일치하기는 하지만 분위기만 보면 대세를 알수 있다고 해서 선거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종언을 말해주는 것이다.
진정한 개혁 또는 미래를 위해서는 열렬 지지층을 뛰어넘는 아니 열렬 지지층의 반대까지도 뛰어넘는 그런 비전 제시가 중요하다.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 진영을 압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들의 지지층과도 충돌하면서 싸워야 한다. 우리 정치사에서도 그와 같은 경우는 수없이 많다.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때였지만 과감하게 북방 외교를 추진해 우리나라 외교 지평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극우 보수층에서 12·12 군사 반란의 주역인 노태우 대통령까지 색안경을 끼고 비판하는 시각이 상당했다. “어찌 빨갱이들과 대화를 하느냐. 더구나 한국전쟁의 원흉 중공(中共)과 수교한다고?”하면서 의심하는 지지계층의 부정적인 시각과 싸우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정책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했을 때 YS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찐보수층’사이에서는 “역시 YS는 DJ에 버금가는 빨갱이였다.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이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금융실명제가 가진 자들의 숨겨진 재산까지 모두 까발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물론 기우였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IMF 극복 과정에서 그를 지지한 노동자 계층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정리해고제를 도입했다. 나라 전체가 거덜나게 생긴 당시로서는 구조조정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진보 정권이었기에 정리해고제 도입이 가능했다는 역설이 통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를 추진하자 일부 열린민주당 지지층 사이에서는 이번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양문석 당선인처럼 “역시 노무현은 진보를 위장한 친미파였다”고 이상한 프레임을 씌웠다. 친일(親日)도 아닌 친미(親美)가 죄가 된다는 것도 이상한 주장이지만.
하다못해 보수의 심장을 자처한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되기 전에 ‘김영란법’을 밀어부쳐 그를 지지하는 보수층 일부에서는 “그러다가 내수가 무너진다”는 아우성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정치인 주변에만 팬덤이 형성되는 기이한 퇴행을 거듭해왔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수년간 부동의 지지율 1위를 유지했던 이낙연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진보층의 철천지 원수 ‘이명박, 박근혜 전대통령의 사면’을 제안했을 때부터였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과정에서 당심에서는 밀렸지만 민심에서는 앞섰던 홍준표가 무너진 것은 윤석열 당시 후보의 조국 수사가 과도했다는 주장을 했던 게 탈이었다. 홍준표 후보는 조국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두둔하고 지키려 한다는 ‘조국수홍(조국을 수호하는 홍준표의 줄임말)' 프레임에 갇혀 보수 열렬지지층으로부터 외면받았다.
이쯤 되면 정치인들 못지 않게 열렬 지지층의 왜곡된 시선도 우리 정치 문화를 퇴행시키는 주요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유례없이 시끄러웠던 22대 총선 이후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열렬 보수지지층만 의식한 지나친 ‘이조심판론’이 패배의 원인이다”는 반성이 나오고,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국회의장 후보를 뽑는 선거에서 ‘진짜 찐명 추미애’ 대신 ‘조금 덜 찐명 우원식’을 선택하는 결과가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정치가 조금이라도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음주운전 스캔들에 휘말린 가수 김호중이 ‘찐 덕질 팬들’과 직접 소통하겠다며 과감하게 공연을 강행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중첩(重疊)되어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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