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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뉴스웨이브][이용웅 칼럼] 격화되는 세계 반도체 전쟁, 한국 정부만 사라졌다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한국은 여전히 ‘정경유착’ 운운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은 “민관일체” 구호 만발.

 

◇장면1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을 때 IMF 등 대단히 힘든 상황이었으며 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제적인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냐고 질문 했을 때 세가지 답을 드렸다”며 “첫 번째도 브로드밴드, 둘째도 브로드밴드, 셋째도 브로드밴드였다”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일본 IT업체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회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런데 브로드밴드가 대체 뭡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손 회장은 “김 전 대통령에서게 브로드밴드가 하이스피드 인터넷이라 답을 드렸다”며 “대통령께서 처음으로 브로드밴드를 외치는 첫 번째 대통령이 돼 브로드밴드를 보급한다면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한국이 초고속 인터넷망의 최고 국가에 되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정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해준다.

 

◇장면2

“젠슨 황이 탁구장 청소로 용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성적이 올 A인 우수학생이 탁구챔피언이 되겠다는 열망에 불타올라 3개월 배운 탁구 실력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대만 경제주간지 금주간(今周刊)의 '젠슨 황이 누구냐'라는 특집 기사에 나온 내용이다. 인공지능(AI) 돌풍을 일으킨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 젠슨 황(黃仁勳) CEO.

 

그는 9살 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을 갔고, 14세 때인 1977년 전미 청소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탁구면 탁구, 공부면 공부 뭐든지 최고를 추구했던 젠슨 황은 1993년초 30세 생일을 불과 1개월 앞두고 다른 2명의 엔지니어 친구들과 함께 4만 달러를 마련해 실리콘밸리에 엔비디아를 공동창업했다. 30여년이 지난 현재 엔비디아의 시총은 2조달러를 넘었다.

 

◇ 정부도 선수로 뛰는 전세계 반도체 전쟁에서 한국정부만 보이지 않는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열풍을 선도하는 '엔비디아 효과'로 미국·일본·대만은 물론 심지어 유럽 증시까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한국만 먼발치에서 구경꾼 신세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미국, 일본 등 각국 정부가 대놓고 반도체 지원책을 쏟아내는 상황에서 한국정부의 역할은 충분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에 첫 공장을 완공하고 지난 2월 24일 준공식을 열었다. 일본 정부가 TSMC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4760억엔(약 4조2,000억원) 규모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와 관련된 사설에서 “100년만에 한번 올까말까한 마지막 기회임을 명심하고 민관이 함께 각오를 다지자”고 역설했다.

 

여기서 눈에 띄는 대목은 바로 “민관이 함께 하자”는 말이다.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에 중화학공업을 일으키면서 “군관민 일체” 운운의 구호가 떠오른다.

 

일본 정부는 이미 지난 2021년 반도체산업을 살리기 위해 2030년까지 반도체 관련 매출을 2021년의 세 배인 15조엔(약 133조원)으로 늘린다는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을 발표했다.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해 5월 세계적 반도체 업체 인사들을 한데 모았다. 이 자리에서 미국 반도체 대기업 마이크론으로부터 4조8000억원대 투자를 유치했고, 심지어 삼성전자의 일본 투자 확대 약속도 받았다.

 

기시다 총리가 초청한 반도체 기업은 우리나라의 삼성전자는 물론 TSMC, 인텔, 마이크론, IBM, IMEC, 어플라이드 마테리얼즈 등 7개 반도체 기업. 모두 세계 반도체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기업들이다.

 

대만 정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대만 행정원은 16㎢에 달하는 과학단지용 신규 용지를 마련하고, 올해 약 200억 대만달러(약 8천400억원)를 시작으로 2027년까지 4년간 1천억 대만달러(약 4조2천억원) 이상의 공사비를 투입할 계획이다.

 

대만은 인재육성에도 적극적이다.

 

반도체를 비롯한 국가중점분야의 고급인력을 양성한다는 취지 아래 2021년 5월 ‘국가중점분야 산학협력 및 인재양성 혁신조례(國家重點領域產學合作及人才培育創新條例)’를 제정했다. 정부와 기업이 대학과 함께 중점분야 전문 연구학원(대학원 격) 설립·운영 자금을 공동으로 마련해 석·박사급 인재를 양성·배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한국에서 반도체 학과 인기가 시들하고 의대 쏠림현상이 일어나는 것과 비교해보면 우울하기 이를데 없는 소식이다.

 

지난 2월 21일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IFS) 2024’ 포럼에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대만과 한국에 넘어간 반도체 주도권을 미국이 가져와야 한다”고 대놓고 선전포고를 했다. 바이든 정부는 이미 2800억 달러(약 373조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법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날 러몬도 장관은 “제2의 반도체 지원법이 필요하면 당장 만들 것이다”고 호언했다.

 

러몬도 장관은 또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대담에서는 반도체법과 관련해 미국 안팎의 기업들이 제출한 투자의향서가 모두 600건이 넘는다고 자랑했다.

 

러몬도 장관은 “대규모 최첨단 반도체 생산 클러스터 2곳을 조성하는 게 원래 목표였는데 이를 초과 달성할 것 같다면서 2030년까지 세계 최첨단 반도체 생산량의 약 20%를 미국에서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첨단 반도체의 미국시대가 본격화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 정부의 올해 반도체 관련 예산은 1조 3천억원에 불과하다.

 

정부는 최근 경기 남부에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 방안’을 발표하면서 622조원 투자규모를 밝혔지만 대부분 민간투자 계획을 합친 숫자이고 세제지원 등 정부지원책은 오리무중이다. 그나마 조성 목표 시기가 2047년까지로, 20년이 넘는 장기 투자 계획이다.

 

각종 규제도 여전해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용지 선정을 마친 지 5년째 아직도 공장 건설을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구마모토 TSMC 공장은 20개월만에 뚝딱 만들어졌다. 이처럼 속도전에서도 이미 우리는 경쟁국들에 크게 밀리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정부가 직접 선수로 뛰고있는 상황에서 각종 규제를 혁파함은 물론이고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세금혜택 등 직접적인 지원은 우리 정부가 지금 당장 추진해도 늦었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이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가 한몸이 되어 뛰어도 부족한 판이다. 시간은 지금 우리 편이 아니다.

 

세계 선두로 치고나가야할 삼성전자는 여전히 사법리스크라는 음지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은 2016년 이후 수감기간을 포함해 형사소송이 7~8년 계속되면서 이재용 회장과 삼성전자가 잃어버린 시간은 아쉽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의혹'은 항소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정부는 아직도 ‘정경유착’이라는 비난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우리 정부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거대 기업에 보조금을 준다거나 과감한 세제혜택을 채택하면 아마도 “부자감세 왠말이냐” “정경유착 음모 분쇄하자”면서 광화문에 집결하자고 외치는 진영들이 들고일어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싸움에 미리 겁을 집어먹는 정부는 더 이상 보고싶지 않다.

 

◇ 국내 스타트업도 마음껏 뛸 수 있도록 정부는 규제보다 지원을

“우리 회사는 폐업까지 30일 남았습니다”

 

지금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누구나 겪는 좌절의 시기를 지나갈 때 이런 구호를 회사에 써붙였다.

 

특히 2002년 닷컴붕괴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문을 닫을 위기에 직면했지만 젠슨 황은 오히려 “여러분은 항상 폐업의 길목에 서있습니다”고 주변과 직원들을 독려하면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스타트업들을 위협하는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오는 경제위기만은 아니다.

 

2022년 CES에서 헬스케어 반지 기술로 혁신상을 받은 '스카이랩스'이 처지를 보자. 상을 받은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 우리는 관련 제품을 시장에서 찾을 수 없다. 시계 최초로 반지 형태의 24시간 연속 혈압 측정기 '카트 BP를'개발했지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건강보험 등재 여부를 판단하는 심평원은 '신의료기술평가'라는 추가 심사를 받으라고 요구했는데 기존 팔뚝 혈압 측정 방식과 다르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라고 한다. 이래가지고 탁구선수로 활약하다 IT로 뛰어들어 대박을 친 젠슨 황과 같은 CEO를 어떻게 키워낸다는 말인가.

 

지난 2월 반도체 수출은 99억달러를 기록해 지난해보다 66.7% 증가했다. 이 같은 증가율은 2017년 10월(+69.6%) 이후 최고 수준이다. 반도체 덕분에 2월 전체 수출은 작년 10월 이후 5개월 연속 늘어나 무역수지 역시 9개월째 흑자 행진 중이다.

이처럼 반도체는 여전히 한국경제의 핵심이다.

 

정부와 기업들은 국가의 운명이 앞으로 수년내에 결판이 난다는 자세로 뛰는 ‘민관 혼연일체’의 모습을 국민앞에 자랑스럽게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 시작해도 너무 늦은 것 같다.

 

이용웅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