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웨이브 = 이용웅 주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달러 강세에 가속도가 붙은 이후 국내에서는 계엄·탄핵 사태까지 불거져 원화값은 말 그대로 추풍낙엽(秋風落葉)이다.
24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4.4원 오른 1456.4원에 마감했다. 이는 연중 최고치인데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3월 13일(1483.5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원화가치가 그만큼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이머징 통화 가치를 대변하는 JP모건 이머징 통화지수는 올 한해 약 10% 추락했고 유로와 일본 엔 등 주요 여섯 개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1973년=100)는 같은 기간 6.2% 상승한 것을 보면 이머징 통화가치 하락폭이 상대적으로 크다.
한국 원화값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낙폭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트럼프 시대 돌입이라는 외부적인 변수에다 계엄 등 국내 정정 불안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 출범, 중국 경제 부진, 한은 추가 금리인하 등 환율 상승요인 쌓여가
세계경제 측면에서는 트럼프 2기가 도래했다는 단순한 현실 이면에 미국 국채금리가 지속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12월 FOMC 회의 이후 미 연준의 금리인하 속도 조절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지자 미 국채 금리가 상승 흐름을 타고 있다.
여기에다 중국경제 부진이 아시아 통화의 동반 약세를 부추키면서 특히 한국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23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중국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미국과는 달리 지난 16일 연 1.74%로 사상 최저 수준이라고 한다.
경제가 둔화할 것으로 예상되면 안전자산인 채권의 수요가 높아져 채권값이 상승(채권금리 하락)하기 때문에 중국 국채금리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비관적이 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24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내년에 사상 최대 규모인 3조 위안(599조원) 규모의 특별 국채를 발행할 계획인데 이는 올해 발행규모의 3배에 육박한다. 그만큼 중국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깊이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중국 정부는 내년 경제 성장률 목표치를 5%로 잡고 있지만 밖에서 보는 시각은 회의적이다.
한국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등 외부기관은 내년 중국 경제가 4%초·중반대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4%대라는 수치도 사실은 과장된 것이고 외부에서는 지난 2~3년간 중국의 실질적인 경제성장률은 중국 당국의 통계 거품을 빼면 2% 수준이라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은행은 25일 공개한 '2025년 통화신용정책 운영 방향' 보고서에서 “기준금리는 물가상승률이 안정세를 지속하고 성장의 하방압력이 완화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금융안정 리스크에도 유의하면서 경제상황 변화에 맞추어 ‘추가적으로 인하’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씨티은행은 “한은은 계엄 사태에 대응해 안정적 경제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할 것”이라며 “내년 1월 0.25%포인트의 추가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환율에 변화를 주는 요인으로 해외 악재가 쌓이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정정불안에다 내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추가적인 금리인하가 예고되어 있어 환율 상승 압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판국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대외순자산이 1조 달러를 넘고 서학개미들의 미국주식 보유금액만 해도 160조원이 넘는다는 보도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가 보유한 달러가 근본적으로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1400원을 돌파한 뒤 1500원까지 위협하는 원·달러 환율이 한국 경제를 전반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상황은 당분간 개선될 기미는 없다.
◇ 1500원까지 위협하는 환율상승은 수입물가 자극해 ‘칩플레이션’을 심화시키는 부작용
우리는 환율이 1200원, 1300원, 1400원을 찍을 때마다 ‘빅 피겨(bigfigur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전적 의미만을 보면 경제 금융 시장에서 환율을 표시하거나, 딜러들이 호가를 부를 때 전체가 아닌 소수점 이하의 두 자리만 표시하거나 말하는 것을 ‘빅피겨’라고 한다.
한 때 우리는 1400원이라는 숫자를 ‘빅피겨’라고 불렀지만 어느새 빅피겨는 1500원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일정한 수치를 빅피겨라고 부를 때는 그만큼 높은 가격대이고 그 이후부터는 변동폭이 작아 소수점 이하로만 호가를 부른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같은 용어설명과는 달리 ‘빅피겨 1400원’시대가 시작되자 환율이 소수점 이하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두자리 수인 몇십원 단위로 널뛰고 있다.
이제 외환 시장은 1400원이라는 환율이 상단 저항선이 아니라 하단 저항선으로 작용하면서 1500원이라는 숫자를 경험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고환율은 수입물가를 자극하는데, 특히 저가 수입물품에 대한 악영향이 가장 크게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은행은 최근 ‘누가 고(高)인플레이션의 충격을 더 크게 받았나?: 칩플레이션(Cheapflation)을 통해 본 인플레이션 불평등“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인플레이션이 결국 저소득자들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여러 수치로 보여주었다.
가계마다 소득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주체들이 구매하는 상품 브랜드는 서로 다른데, 브랜드별 가격의 수준과 상승률에 차이가 있을 경우 각 가계가 실제로 체감하는 물가인 실효물가와 공식 물가지수 간에 괴리가 발생한다는 점에 보고서는 착안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주요국에서는 저렴한 상품 브랜드의 가격이 더 빠르게 상승한 ‘칩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로 인해 취약계층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더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은행은 국내 상품 브랜드의 가격 수준과 상승률을 살펴보았는데, 2019년 당시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상품일수록 이후 가격 상승률이 더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국내 여타 품목에서도 이와 유사한 칩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물가가 오를수록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싼 브랜드를 찾아나서기 때문에 저렴한 상품에 수요가 몰려 가격상승폭이 고가제품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저가 브랜드에 의존해오던 저소득층이 받는 물가 충격이 상대적으로 더 클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요즘처럼 환율이 급듭하면 ‘칩플레이션’은 더욱 확산될 수 밖에 없다.
저가 상품은 제조 과정에서 투입비용을 줄이기 위해 국내산 재료보다는 가격이 비교적 낮은 수입 원자재를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이와 관련 “팬데믹 이후 글로벌 공급망 병목,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수입 제조용 원재료의 가격이 국내산 원재료보다 훨씬 가파르게 상승했다”고 지적하고 “저가 상품의 경우 보통 마진이 작아 비용충격에 대한 흡수력이 부족한데, 이처럼 수입 원자재가격이 급등하게 되면 저가 상품의 판매가격에 상당 부분 전가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칩플레이션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인플레이션이 높은 상황에서 소비자 수요가 더 저렴한 상품으로 전환된 점 역시 칩플레이션의 주요 요인이다.
일반적으로 가계는 인플레이션이 높은 시기에 실질소득 감소에 따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이전에 소비하던 상품과 비슷하지만 더 싼 상품을 구매하거나 동일한 상품이라도 더 낮은 가격에 판매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소비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칩플레이션은 가계 소득계층 간 실효물가의 격차를 벌림으로써 인플레이션 불평등(inflation inequality)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고 지적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한국은행의 조강철 차장은 “칩플레이션은 물가 급등기에 나타나며 각 소득계층이 주로 구입하는 상품의 가격 수준에 따라 실효 물가가 달라진다”며 “정부 정책 측면에서는 향후 인플레이션이 높은 시기에 저소득층의 인플레이션 부담을 완화시킬 수 있는 중·저가 상품 집중 선별 지원이나 할당 관세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 소득배분은 악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통계청이 지난달 발표한 '3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3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525만5000원으로 1년 전보다 4.4% 증가했지만 소득 분배 지표는 악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득 상위 20% 가구인 5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154만3000원으로 6.5% 늘었지만 소득 하위 20% 가구인 1분위 가구 소득은 5.4% 늘어난 118만2000원이어서 증가폭에 1%포인트 차이가 난다.
하위 20%의 소득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재산소득(1만3000원)과 정부 등으로부터 지원받는 이전소득(78만2000원)은 각각 31.4%, 10.4% 늘었기 때문인데 근로소득(25만4000원)의 경우 3.4% 감소하면서 2분기(-7.5%)에 이어 2개 분기째 감소세를 이어간 점이 눈에 띈다.
이처럼 분배가 악화되는 가운데 환율은 급등해 저가물품일수록 물가상승폭이 커지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한은이 지난 24일 발표한 '2024년 하반기 금융안정보고서: 최근 자영업자 대출의 차주 특성 및 연체율 분석'에 따르면 취약 자영업자의 대출 연체율은 11.55%로, 비취약 자영업자(0.42%)와 큰 격차를 보였다.
취약 자영업자는 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빚을 낸 다중 채무자이며 저소득 또는 저신용 자영업자를 말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고환율은 칩플레이션을 더욱 자극하고 크게 오른 물가는 결국 저소득층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는 점을 감안해서 환율 관리에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1500원대까지 위협하는 고환율은 수출입에 관여하는 기업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저소득층에 직격탄을 날리는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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