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웨이브 = 이용웅 주필
“아들과 저녁식사를 막 마쳤을 때였다. 한국은 저녁 8시쯤이었고 아주 평화로운 저녁시간이었다. 누군가 전화를 해서 (수상소식을) 알려줬고 당연히 매우 놀랐다. 오늘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좀 읽고 산책을 했다. 아주 편안한 하루였다. 아들도 놀랐지만 (수상에 대해) 같이 이야기 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10일 저녁 스웨덴 한림원에서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국 작가 한강(53)을 선정했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내놓은 수상 수감이다.
가족과 밥먹고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걷는 것이 어찌 보면 축복이 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다음은 2017년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서로 더 큰 핵단추를 가지고 있다고 허풍을 떨면서 한반도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 한강이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지금과 그때,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태도를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북한에 대해 공포스럽게 바라볼 때도,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나 심지어 미국이 북한에 대한 선제 타격 가능성에 대한 보도가 나와도 학교, 병원, 서점, 플로리스트(화원), 영화관, 카페 등 한국은 여느 때처럼 모두 문을 열고 있다. 어린 아이들은 노란 학교 버스를 타고 창 밖의 부모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으며, 좀 더 큰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버스에 오르고 있다. 머리를 감고 아직 축축한 채로 말이다. 연인들은 꽃과 케익을 들고 카페로 향하고 있다.”
물론 한강은 당시 한반도가 아무런 전쟁 위기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쓴 것은 아니다.
한강은 이미 폭력이 일상화되고 우리 시민들 마음 깊숙이 들어와 고황(膏肓)이 되어버린 그런 시대적 아픔을 상징하는 글을 내놓은 것이다.
한강은 같은 기고문에서 “모든 사람이 정말 전쟁의 두려움에서 초월한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않다. 오히려 수십 년간 축적된 긴장과 공포가 우리 내면에 쌓여있고, 그것들이 단조로운 대화 속에서 짧게 번뜩인다”고 강조했다.
◇여전히 진행중인 한반도 위기와 함께 한강의 소설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2006년 북한 핵위기가 고조될 즈음 우리나라는 독일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어느 언론인은 “한국은 이상한 나라이다. 당장 북한에서 핵실험이 준비되고 있는데도 북한의 위협보다는 스위스의 공격수 알렉산더 프라이스를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글을 썼다.
당시 우리는 스위스에 2대0으로 패했다. 시민들은 북한 핵실험보다는 월드컵 탈락에 더 절망감을 느꼈다.
외신들이 한국적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코로나 사태 초기 대구에서 대규모 감염사태가 벌어지고 대구봉쇄론까지 거론되던 바로 그 즈음에 외신들은 대구 로포기사를 앞다투어 내놓았는데 “너무 평온하다. 사재기 등은 벌어지지 않았다. 시민들은 차분하게 정부의 진단검사에 응하고 놀라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그런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며 기이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위기가 이미 일상화된 한국의 모습이었다.
우리나라는 30년 가까이 해외에서는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요란을 떨어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해왔다.
어찌 보면 정상이고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비정상이다.
노벨문학상 소식을 들은 한강이 “평화로운 저녁”이었다고 했지만 지금 우리나라가 진정 평화롭다고 느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북한이 대북 침투 무인기와 북한이 남한에 보내고 있는 쓰레기 풍선으로 남북한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때보다 엄중한 수사학이 난무하고 있다.
북한이 남한 무인기의 평양 추가 침투 가능성에 대응한다며 인민군 총참모부 지시로 국경 부근 포병부대들에 완전사격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평양 방공망 감시초소를 증강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3일 보도했다.
뿐만 아니다. 중국군이 14일 대만 주변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바야흐로 한반도 주변 정세가 다시 한번 엄중한 사태변화에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소식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가자 지구 등에서는 지금도 전쟁중인데 어찌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 수 있느냐”는 한강의 발언은 이해할만 하다.
이스라엘군은 지금 이 시간, 레바논 주둔 유엔평화유지군까지 공격하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10일(현지시간) 한강을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한강의 작품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림원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갔는데 “한강은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서며 작품마다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그는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갖고 있으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되었다”고 밝혔다.
외신들은 러시아 우크라이나전쟁,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 등 최근 전개되고 있는 세계적인 폭력사태가 한림원으로 하여금 한강의 작품세계에 새삼 깊은 관심을 주게 되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우리 독자들에게는 작가 한강은 맨부커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가 먼저 떠올리겠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2014년작 장편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세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낸 2021년작 '작별하지 않는다' 등은 한강의 마음 속 상처가 어디에 기원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잘 알다시피 한강의 부친 한승원 역시 상당히 이름을 날린 작가이다.
10대 초반이었던가 그 어느날 아버지 한승원이 보관하고 있던 광주관련 사진첩에서 떠나온 고향 광주의 비극을 발견하고 오늘까지도 그 비극과 싸워온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어찌 보면 비극적인 한국 근현대사가 세계사와 맞물리는 그런 현장이 될지도 모른다.
한승원 역시 장편 소설 ‘동학제’에서 올해로 130주년을 맞이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잔혹한 스토리를 알려준 작가이다.
동학혁명 100주년인 1994년 소설 ‘동학제’를 완간한 한승원은 작가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100년 전의 갑오 동학년 그 무렵, 이 땅 방방곡곡에서 봉기에 참여했다가 이슬처럼 떨어져 간 무명의 동학군들과 혼령들에게 무릎 끓고 절한다.”
한승원-한강 부녀의 작품세계는 동학농민혁명부터 4.3 제주사태, 광주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의 반영이었다.
◇몽상 속으로 걸어들어간 무라카미 하루키와 과거와 미래의 전쟁에 뛰어든 한강의 차이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에 고배를 마시자 일본 곳곳에서는 아쉬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10일 하루키의 모교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고로엔 초등학교에는 그의 동창과 이웃 주민들, 학교 교직원들이 모여 노벨 문학상 발표를 지켜보았는데 스웨덴 한림원이 수상자로 한국의 여성 작가 한강을 호명하자 학교에선 탄식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거의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세계적인 작가이다.
하루키는 한강 훨씬 이전부터 전세계에 팬덤 독자층을 가진 영향력을 과시해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초기 작품 ‘노루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돼 가히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켰다.
원래 1988년 ‘노르웨이의 숲’ 원제 그대로 출간됐으나 판매량이 부진했고, 후에 문학사상사에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바꿔 재출간해 엄청난 히트를 쳤다.
하루키의 수많은 소설 중에서 초기작인 ‘노르웨이의 숲’을 능가하는 베스트셀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 소설은 일본과 한국 그리고 전세계 판매부수가 1000만부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단순한 연애소설로 알려진 ‘상실의 시대’가 1990년대 우리나라에서 왜 그렇게 빅히트를 했을까.
소설의 배경은 1960년대 바야흐로 ‘전공투’로 대변되는 일본판 운동권 문화의 끝자락이었다.
이른바 반미 공산혁명의 기치가 일본 대학가에서 그 깃발을 내리고 있을 때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지향점을 잃은 일본 청춘들의 그 절묘한 절망과 한줄기 희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절제되고 몽환적인 문장으로 색칠한 그런 작품이었다.
‘상실의 시대’가 우리 문단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의 소설은 우리나라 운동권 문학에서 한때 유행했던 이른바 ‘후일담 문학’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후일담 문학’이란 그러니까 한때 청춘을 옭아맨 ‘혁명의 과제’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풀려난 청춘들의 방황일기였다.
수십만 부가 팔린 최영미의 시집 ‘서른 전치는 끝났다’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공지영의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등은 대표적인 후일담 문학이다.
이들 작품 제목에서도 언급되는 ‘잔치는 끝났다’ ‘방황’ 등의 단어에서 1980~90년대 역사적 현장을 기억 저편으로 흘려보내고 이제 그 끝자락을 잠시 회고하는 ‘후일담 문학’의 전형을 읽을 수 있다.
올초 별세한 소설가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후일담 문학의 대표작으로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소설은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한국 사회의 암울한 상황에서 20대를 지낸 주인공이 30대에 이르러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평소 ‘상실의 시대’를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시달려왔다.
결국 후일담 문학은 엄혹했던 시절을 박제(剝製)해서 액자 속에 가두어두는 그런 문학을 말한다.
한강의 소설은 후일담 문학이 아니다. 한강이 그린 광주와 제주의 모습은 세계인들에게는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 전선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와 연결이 될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그 모든 폭력과 이어진다.
반면에 하루키의 또 다른 히트작 ‘1Q84’는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몽환(夢幻)과 수수께끼로 이어지는 수사학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한강의 소설은 과거의 상처를 ‘박제’에서 해방시켜 지금 이 시점으로 옮겨놓았다면, 하루키의 소설은 우리가 일상의 터널에서 탈출하는 것을 방해하고 몽상의 틀에 밀어넣어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차이점이 있다.
2024년 노벨문학상이 하루키 대신 한강을 선택한 것은 흔히 말하듯 ‘번역의 힘’이 아니고 여전히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폭력의 힘’이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하루키식 ‘몽상’을 끝내고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그런 세계사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뉴스웨이브][단독]코리아써키트, 印 앰버그룹과 'PCB' 생산 합작법인 설립 (1) | 2024.10.16 |
---|---|
[뉴스웨이브]현대모비스, 슬로바키아 노바키에 신공장 짓는다...'2500억 투자' (0) | 2024.10.16 |
[뉴스웨이브]'현대차·기아 협력사' 유라, 튀니지 공장 2026년까지 대규모 증설 (2) | 2024.10.14 |
[이용웅 칼럼]한은 금리인하, ‘실기’했다는 우려 피할 수 있을까 (6) | 2024.10.11 |
[이용웅 칼럼]북·중·러 관계와 '푸틴 책사' 알렉산드르 두긴 (6) | 2024.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