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웨이브 = 이용웅 주필
지난 10월 6일은 북한과 중국이 수교 75주년을 맞은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권에서 흔히 나오는 화려한 수식어가 생략된 의례적인 축전만 오고갔다.
양국의 축전 문구는 전년에 비해 절반 가량 줄었고 ‘존경하는’ 운운의 의례적인 표현도 삭제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북한과 중국 사이에 깊은 냉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국내외 언론들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
북중 수교 75주년을 맞아 북중 접경지대를 찾은 국내언론들의 기사 내용을 보아도 “3중 철조망 북한은 거대한 수용소”(조선일보), “베이징 북한대사관에 '시진핑 사진 한 장' 안 걸렸다... 북중 수교 75주년 냉기류”(한국일보), “북중 수교 75주년...'신압록강 대교' 개통은 커녕 현판도 철거”(YTN) “북·중 관문 단둥엔 오성홍기만…신압록강대교 개통은 언제 될까”(한겨레신문) 등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전하고 있다.
이에 앞서 일본 아사히 신문은 지난달에 “북한과 중국을 잇는 신압록강대교가 양국 수교 75주년이 되는 내달 6일에 맞춰 개통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고 보도하면서 “다만 올해 안에 신압록강대교가 개통되지 않으면 관계 악화라는 시각에 힘이 실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신압록강대교는 10년 전인 2014년에 완공됐지만 북한과 중국의 관계 악화 등으로 북한측 주변 시설의 정비가 진행되지 않아 줄곧 미개통 상태였다. 그런데 북한과 중국의 수교를 기념하는 날에도 아무 소식이 없어 북중 관계 악화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매체인 키이우 포스트는 4일(현지시각) 정보 소식통을 인용해 도네츠크 인근 러시아 점령지역에 단행한 미사일 공격으로 북한 장교 6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8일 열린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김용현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러시아를 지원하는 정규군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북한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푸틴의 책사 알렉산드르 두긴의 ‘신유라시아’ 철학과 북중러 관계의 변수
“신이시여, 차르를 지켜주소서.”
푸틴이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러시아 극우 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62)은 7일 0시가 지나자마자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이런 인사말을 올렸다.
‘차르’는 제정 러시아 시절 황제 칭호인데, 7일은 바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72번째 생일이었다.
러시아의 정치철학자인 알렉산드르 두긴은 팽창주의를 추진하는 푸틴에게 사상적 배경을 제공해주는 인물이다. 서방에서는 그를 푸틴의 라스푸틴이라고 지칭한다. 라스푸틴은 제정 러시아 말기에 등장해 제정러시아의 몰락을 재촉한 괴승(怪僧)이었다.
얼마 전에는 그를 암살하려는 공격 때문에 딸이 사망하는 일도 겪었다.
두긴은 20세기초 러시아에서 유행했던 ‘신(新)유라시아주의’를 다시 주도하고 있는 핵심 인물이다.
그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중심의 ‘범대서양주의’(Atlanticism)에 맞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신(新)유라시아주의’(Neo-Eurasianism)를 주창하면서 러시아가 바로 그 중심에 있다고 강조한다.
두긴은 1997년 이같은 주장을 담은 ‘지정학의 기초 : 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러시아군 장교 교육 과정의 교과서로도 채택됐다.
이에 화답하듯 두긴은 2007년에 이런 말을 했다.
“푸틴의 길에 더 이상 반대자가 있어서는 안된다. 만일 있다면 그들은 정신병자이다. 병원에 보내어 검사를 받게 해야 한다. 푸틴은 어디든지 있다. 푸틴은 일체이고, 푸틴은 절대적이고, 푸틴을 불가결이다.”
두긴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러시아 명으로는 키예프)에 기반한 유럽적 레거시와 더불어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민적인
레거시가 러시아 정신문명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두긴의 이같은 논리에 따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두긴이 내세운 대독일 전략은 더 파격적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는 독일이 중부 및 동부 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을 용인하고,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유화적 제스처의 상징으로 현재 러시아의 영토인 칼리닌그라드를 독일에게 돌려주면서 모스크바-베를린 동맹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을 대서양주의 세력권에서 떼어내야 러시아의 신유라시아 구상의 실현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두긴은 이같은 목적을 위해 독일이 러시아의 천연자원에 완전 종속되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천연가스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온 독일이 현재 처한 에너지난을 생각해보면 두긴의 주장이 그저 러시아 민족주의자의 몽상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찌감치 독일과는 달리 영국은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도록 유도해서 대서양세력을 유럽대륙에서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실제 영국의 탈퇴가 현실화되자 서구에서는 두긴의 생각을 흘려버리지 못하고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두긴의 철학은 결국 제정러시아 시대의 패권주의의 부활에 다름아닌데 대중국 관계에서 그같은 성격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두긴의 러시아 중심주의 사상은 만주와 신장위구르, 티베트, 몽골 등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만들어 제정러시아가 이루지 못한 꿈을 완성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긴은 아예 ‘중국해체론’을 내세웠다.
두긴은 더 나아가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의 화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쿠릴 열도를 일본에 반환하고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종의 ‘중국 포위론’인 셈이다.
물론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두긴의 주장을 무조건 따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러시아 지성은 물론 권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두긴의 ‘중국 해체론’이 중국의 의구심을 깊게 만들 수 있음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사정이 이러할진데 중국과 러시아가 지금은 반미전선으로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것 같지만 긴장관계는 어쩔수 없이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두긴이 러시아의 가장 강력한 우방국으로 꼽는 나라는 벨라루스, 이란 그리고 북한이다.
그는 북한을 미국에 대항하는 중요한 나라로 보았다. 그는 한 온라인 동영상에서 “김정은의 미사일은 우리의 미사일”이라고 했다.
두긴의 사상에서 분석해보면 북한은 푸틴이 추구하는 ‘신유라시아주의’의 첨병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우방국이자 전위국가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북한에 대해 경계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지난 5월 두긴이 돌연 웨이보에 계정을 개설하고 “중국의 발전이 세계 경제 지형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화와 과학기술 같은 많은 분야에서 강한 활력을 보여줬다”고 칭찬하자, 그의 ‘중국 해체론’을 이미 알고 있던 중국 네티즌들은 두긴의 친중국 발언에 감사하기는 커녕 “중국과 러시아의 영원한 우호를 위해 사할린과 블라디보스토크를 반환하라”는 댓글에 환호성을 올렸다.
중국과 러시아의 해묵은 영토 분쟁이 재연될 수 있는 아주 위태로운 정서적 대결국면이 아닐 수 없다.
◇북한 최고회의서 ‘통일삭제’ 언급 없어...북방외교 복원 시급
북한은 지난 7~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1차 회의를 열어 사회주의헌법 일부 내용을 수정보충(개정)했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1월 지시한 영토 조항 반영과 '통일' 삭제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또 김 위원장은 회의에 아예 참석하지도 않았다.
물론 최고회의 결과가 아직 정확하게 전달된 것은 아니기에 좀더 시간을 두고 확인해야겠지만 ‘한반도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론’은 여전히 중요화두로 존재함을 부인할 수는 없다.
김 위원장은 최고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7일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찾아 한 연설에서 “이전 시기에는 우리가 그 무슨 남녘해방이라는 소리도 많이 했고 무력통일이라는 말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이에 관심이 없으며 두 개 국가를 선언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 나라를 의식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만약 자신들에 대한 무력 사용을 기도할 시에는 핵 공격도 배제하진 않겠다고 위협하고 연일 대남 쓰레기 풍선을 내보내는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 의식하는 것조차도 소름이 끼치고 그 인간들과는 마주서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김 위원장은 한국을 선제공격하지 않을테니 자기들을 가만히 놔두라고 강조한 셈이다.
결국 김정은은 한반도 2개의 국가론을 수사적으로 언급하면서 아직 최고회의에서 명문화하지는 않은 그런 중간단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로서는 중국 등 주변국들이 새로운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정치적 고려도 했을 수 있다.
어쨌든 중국의 입장에서는 푸틴의 유라시아세력과 미국의 해양세력 사이에서 안팎곱사등이 될 수 있는 위기감을 느낄수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완충 역할을 해야 하는 한반도의 남쪽은 미국에, 북쪽은 러시아와 밀접해지는 상황을 중국이 용납하기는 무척 어려운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중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이 평화통일이라는 화해 이념을 포기하고 2개의 적대적인 국가가 존재하는 새로운 개념을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그동안 소홀히 방치했던 북방외교의 창조적 복원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뉴욕에서 회담을 갖고 오는 11월 페루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내년 한국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경주)를 기회삼아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간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관심을 모았다.
시 주석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7월 방한 이후 현재까지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 9일부터 라오스에서 개최되는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때문에 윤석열 대통령과의 회담이 이뤄질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문제 역시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북한과 러시아와 관계가 깊어질수록 어떤 과정을 거치든간에 우리나라와 러시아와의 관계 복원 역시 중요해지고 있다.
북한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남북한의 치열한 대치 전략에 발맞추는 ‘비례적 대응’보다는 북한의 대중국, 대러시아 동맹관계를 느슨하게 만드는 ‘북방외교’의 복원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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