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표현에 따르면 ‘피칠갑이 난무하는’ 총선 국면이라고 하지만 입법활동이 올스톱되면서 국민 생명과도 직간접적인 관련이 깊은 ‘고준위 특별법’까지 자동폐기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특히 이 법안은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는 K원전의 앞날과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해서 전문가들은 ‘고준위 폐기물 처리장’이 없는 원전은 ‘화장실이 없는 아파트’나 다름없다는 비유를 하고 있다.
◇해외 원전 수주 청신호 잇따르고 정부지원도 구체화되면서 K원전 부활 몸부림
지난 2월 현대건설이 총사업비 18조7000억원 규모의 불가리아 코즐로두이 원자력발전소 신규 공사의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K원전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아니냐는 분석들이 주를 이루었다.
현대건설이 해외에서 대형 원전 사업 계약을 따낸 것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이후 15년 만이니 당연히 그런 분석이 나올만 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르면 오는 6월 체코 정부가 발주한 원전 4기의 입찰 결과가 나온다. 최근 미국 원전업체 웨스팅하우스가 자격 미달로 탈락하면서, 사실상 한국과 프랑스의 2파전으로 진행되고 있어 우리나라의 수주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대형 원전뿐 아니라 폴란드·우크라이나·루마니아 등에서 발주가 예상되는 소형모듈원전(SMR) 수주에도 청신호가 켜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일찌감치 원전 생태계 복원과 K원전 지원책을 강화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부는 원전 산업 정상화를 넘어 올해를 원전 재도약 원년으로 만들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펼칠 것”이라며 “3조3000억원 규모의 원전 일감과 1조원 규모의 특별금융을 지원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월 창원 경남도청에서 '다시 뛰는 원전산업, 활력 넘치는 창원·경남'을 주제로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를 열어 이같이 약속했다.
그렇다면 정부는 하필이면 왜 창원에서 이같은 민생토론회를 열었을까.
지난 1982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에너빌리티)이 창원종합기계단지로 입주한 이후, 국내 최초의 원전 주기기 국산화가 창원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창원국가산단은 한빛 3·4호기 주기기 제작을 통해 생산액 10조원을 돌파(‘92년)한 이후 현재까지도 국내 모든 원전의 주기기는 창원에서 제작되고 있다. 원자력산업은 창원의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어온 것이다.
이처럼 원전은 지역경제에도 효자 역할을 충분히 해왔다.
원전 확대는 이미 세계적인 추세이다. 원전건설에 총력을 기울이는 중국은 2035년 전체 전력생산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율을 현 5%에서 10%로 늘린다는 방침이고 원전 23기를 보유중인 인도 역시 8기를 추가로 건설중이다.
◇‘고준위 특별법’ 없으면 10년 이내 국내 원전 절반 이상 가동중지 우려
문재인 정부에서 외면받아 온 원전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을 크게 환영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바로 사용후 핵연료 저장시설의 확충이다.
이와 관련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최근 사용후 핵연료 저장시설이 6년 뒤면 포화상태에 이를 것이라며 21대 국회에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 특별법'(고준위 특별법) 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현재 고준위 폐기물인 사용 후 핵연료는 각 원전 안에 있는 수조인 습식저장조에 보관되는 방식으로 주로 처리되고 있다.
2030년 한빛 원전, 2031년 한울 원전, 2032년 고리 원전 순으로 원전 내 수조는 한계에 이르게 된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영구 처분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고준위 특별법 제정안은 여야에 의해 각각 발의된 상태이지만 핵심 쟁점인 시설 저장 용량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마저도 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제정안은 자동 폐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여야 의원들이 발의한 고준위 특별법이 상임위원회에 계류된 채 2월 임시국회 본회의가 지난 29일 끝났기 때문이다.
고준위 특별법은 사실상 4월 총선 이후로 법안 처리가 미뤄지면서 자동 폐기 수순을 밟게 됐고, 5월 임시국회 처리 가능성도 매우 불투명해졌다.
물론 민주당 등 야당은 고준위 특별법을 처리해주면 원전 확대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오해받을 것으로 우려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원전 상위 10개국 중 부지 선정에 착수하지 못한 국가는 한국과 인도뿐이다. 고준위 폐기물 처리는 고도의 기술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 분야 최고 선도국인 핀란드·스웨덴 등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실제 처분하는 단계까지 진입하고 있다. 핀란드는 남서부 발트해역의 올킬로오토(Olkiluoto)에 건설하고 있는 고준위 방폐물 영구 처분장을 내년부터 시운전할 계획이다. 2025년에는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을 운영한다는 목표다.
국내 고준위 방폐물 관리기술은 미국, 스웨덴, 핀란드 등과 비교할 때 운반 분야는 84%, 저장 80%, 부지 62%, 처분 57% 수준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국내에 폐기물 처리시설 하나 만들지 못하면서 K원전 수출을 외치는 것은 아무리 봐도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K원전 수출은 사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과업이었다.
원전을 둘러싼 정치권의 대립만이 문제는 아니다. 일부 시민단체 등에서는 고준위 특별법이 ‘핵 폐기장화’의 빌미가 될 수 있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원전지역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탈핵시민행동은 지난달 28일 성명을 내고 “국회에서 발의한 고준위특별법이 지역 주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악법”이라며 폐기를 촉구했다.
이들은 “특별법안에 ‘원전 부지 내 폐기물 저장시설 설치’ 조항 때문에 현재 위치가 최종 처분장이 될 위험이 크다”며 고준위 폐기물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를 다시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총선이 끝나고 정치의 계절이 마무리된다면 22대 국회에서 이 문제가 다시 점화되겠지만 시민단체와 지역 주민들의 반발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만큼 충분히 고려하고 상의하면서 특별법 제정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고준위 폐기물 처리문제는 우리가 원전을 가동하는 한에는 찬반여부를 떠나 국민의 생명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여야 정쟁의 이슈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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