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웨이브 = 이용웅 주필
미국은 요즘 H-1B 비자 문제로 시끄럽다.
H-1B 비자는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을 이론적 및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전문가를 위한 비자인데, 오늘날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지탱해주는 주요 무기로 인식된다.
그런데 최근 이 비자 문제를 놓고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마가) 지지론자들이 일대 격돌을 벌였다.
머스크는 자신이 과거 H-1B 비자를 통해 미국으로 이주했음을 언급하며 “실리콘밸리에서 우수한 엔지니어 인재는 영구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했다.
머스크가 이처럼 H-1B 비자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거듭 강조하고 급기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마음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는데는 성공했지만 여진은 여전하다.
우리는 미국 뉴스를 접할 때 트럼프라는 이름은 귀가 따갑게 듣는데 그만큼 자주 등장하는 사람은 앞에 언급한 머스크이고, 또 한 사람 이름을 들자면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이다.
공교롭게도 머스크는 백인이지만 남아공 출신이고 젠슨황은 대만 출신인 것에서도 알수 있듯이 모두 미국 밖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이다.
최근 미국 기업 중에서 우리나라 언론매체에 계속 등장하는 이름은 엔비디아, 테슬라에 이어 브로드컴이라는 회사이다.
가장 최근 뉴스로는 지난달 27일부터 지난 2일까지 일주일간 서학개미들이 가장 많이 순매수한 종목은 브로드컴으로 1억2079만달러(1770억원)어치 매수했다고 한다.
브로드컴은 지난해 주가가 두배 이상(107.70%) 폭등하며 ‘제2의 엔비디아’로 급부상했다. 지난달에는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하면서 엔비디아, TSMC에 이어 반도체 기업으로는 세 번째로 시총 1조달러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그럼에도 우리 귀에 브로드컴의 CEO 이름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지금 브로드컴의 기세로 보아 조만간 우리 언론에서도 ‘혹 탄’이라는 이름이 쉼없이 등장할 전망이다.
공교롭게도 탄 CEO 역시 미국 밖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그것도 중국계이다.
서두에도 간단하게 언급했듯이 트럼프 집권 이후 아직은 잠잠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른바 ‘MAGA’ 집단이 에너지를 축적해서 미국내 인종 및 태생 갈등이 본격화되면 ‘혹 탄’이라는 이름 역시 미국 분열의 상징이 될지도 모른다.
◇말레이시아계 혹 탄 CEO ,반도체 업계 핵심 인사로 급부상
브로드컴 CEO 이름은 우리 매체에 호크 탄, 혹은 혹 탄으로 불린다.
혹 탄은 ‘Tan Hock Eng’(陳福陽)으로 발음되지만 일단 이 칼럼에서는 혹 탄으로 부르겠다.
탄은 1951년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1년 장학금을 받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 입학, 1975년에 기계 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해 말에 같은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탄은 몇 년 후 MBA를 취득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에 다녔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받은 그는 펩시코, 제너럴모터스(GM) 등에서 재무 담당 임원 등으로 일하며 이름을 날린 뒤 2005년 미국계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와 실버레이크 파트너스가 인수한 싱가포르 반도체 회사인 아바고 경영진으로 영입됐다.
아바고의 경영을 맡은 탄은 과감한 기업 인수합병(M&A)으로 다양한 첨단 기술을 확보했다. 특히 1991년 설립된 미국의 통신용 반도체 개발 업체 브로드컴을 2015년에 370억 달러를 주고 사들여 오늘 날 우리 서학개미들이 열광하는 회사로 성장시킨 것이다. 인수 당시 IT업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로 주목받았다.
탄은 이후 2018년 퀄컴을 상대로 적대적 인수를 시도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좌절됐다.
퀄컴 인수 시도는 싱가포르 업체가 한 것이지만, 당시 트럼프 행정부는 궁극적으로 기술이 중국 쪽으로 넘어가거나 중국 업체들이 5세대 무선통신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탄 CEO가 중국계 말레이시아 태생인 것도 트럼프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브로드컴은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적이 싱가포르에서 미국으로 바뀌게 된다.
◇맞춤형 특화된 반도체 ‘ASIC’ 브로드컴의 도약, 트럼프 시대 미중갈등이 걸림돌로 등장할 수도
생성형 AI 열풍은 전 세계 반도체 판도를 근본에서부터 뒤흔들고 있다.
AI가 시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 엔비디아, TSMC, 브로드컴등 3개사가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을 웃도는 5조 달러(약 7400조원)의 기업가치를 평가받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과거에는 삼성전자·인텔 등이 반도체 업계의 절대강자였다.
반도체 설계부터 제조까지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하는 종합 반도체 기업(IDM)의 아성을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반도체 설계·제조·패키징(조립) 등 공정별로 특화된 기업들이 역할을 나눠 반도체를 개발·생산하고 있다.
AI 반도체 시장의 90%를 장악한 팹리스(fabless·공장 없이 반도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기업)인 미국 엔비디아와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 대만 TSMC가 협업으로 세계적인 아성을 쌓아가는 동안 삼성전자와 인텔 등은 그저 구경꾼 신세로 넘어간 것은 아닌지 지금 시장의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블룸버그는 “2024년이 업계 선구자(인텔)에 힘든 한 해였다면, 2025년은 인텔의 이름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엔비디아의 경쟁자는 인텔도 아니고 삼성전자도 아니다. 바로 브로드컴이다.
와이파이(Wi-Fi), 블루투스 등 저가 통신 장비용 칩을 주로 생산해왔던 브로드컴은 최근 AI 데이터 처리를 지원하는 첨단 반도체를 제작하며 엔비디아의 독주를 견제할 유력한 경쟁자로 등장했다. 특히 고객사 요구에 맞춘 ‘맞춤형 AI 칩(ASIC)’을 출시해 파란을 일으켰다.
엔비디아가 차세대 AI 칩 ‘블랙웰’의 생산과 공급량을 확대하고 나선 것은 바로 브로드컴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엔비디아의 GPU(그래픽 처리 장치)는 범용, 소프트웨어를 변경해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에 사용할 수 있지만 브로드컴의 ASIC는 단일 애플리케이션 또는 좁은 범위의 작업을 위해 설계된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그러니까 이제 각 회사들은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라 엔비디아의 제품을 쓸 수도 있고 브로드컴의 제품을 쓸 수도 있다. 두 회사의 제품이 각각의 고유 고객을 상대로 영업을 확대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또 전력소모가 많고 비싼 GPU보다 ASIC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전력소모가 적어 맞춤형 칩 수요가 폭증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구글,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이 ASIC 개발에 투자하고 있으며 미국 브로드컴과 파트너십을 맺고 오는 2027년까지 100만개가 넘는 AI 칩을 만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브로드컴은 SK하이닉스에 맞춤형 HBM4 공급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고 삼성전자 역시 브로드컴에 HBM4 공급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브로드컴이 내년 출시 예정인 HBM4 확보에 열을 올리는 데는 구글,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의 주문이 몰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엔비디아가 범용 그래픽처리장치(GPU)에 HBM을 붙여 제작하는 AI 가속기 단가가 턱 없이 높아서다.
브로드컴은 지난 10여 년간 끊임없이 M&A를 성공시키며 회사 주가를 끌어올렸다.
탄 CEO는 실적발표회 자리에서 “10년간 M&A는 이 회사의 핵심 전략과 비즈니스 모델의 일부였다. 우리의 까다로운 기준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반도체든 소프트웨어든 훌륭한 자산(인수 대상 기업)을 포트폴리오에 추가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브로드컴 앞날에는 장밋빛만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브로드컴은 연간보고서에서 “보호무역주의의 심화와 관세 인상이 이어지면 우리의 사업 능력이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며 “(중국 정부의 보복 관세 때문에) 중국 기업과 제대로 경쟁하기 어려워지거나, 아예 중국 시장에 발을 들일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걱정했다.
브로드컴의 전체 매출에서 중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를 넘긴다.
지난해 6월 미국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중국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가 브로드컴과 첨단 AI칩을 개발하는 중이며, 개발을 성공할 경우 바이트댄스는 미중 갈등 속에서도 칩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갈수록 격화되고 있는 미중갈등이 변수이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트럼프 정부가 등장하기도 전에 AI 반도체 선두주자 엔비디아의 칩이 중국으로 유출된 과정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은 중국이 엔비디아 등의 AI 칩을 무기 개발 및 해킹에 사용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며 AI 칩 수출 규제를 강화해온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1기 재임 시절 이미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를 반대하면서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을 이유로 들었는데, 앞으로도 엔비디아는 물론 브로드컴에 대한 감시도 심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지금이야 트럼프가 머스크와 찰떡꿍합을 보여주면서 비자 문제 등에 있어서는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미중갈등 문제로 넘어가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다.
육군 중장 출신의 러셀 오너리는 지난달 31일 뉴욕타임스(NYT) 기고에서 “머스크 CEO는 중국과 깊은 사업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의구심을 보냈다.
오너리는 기고문에서 머스크 CEO가 중국 상하이에서 기가팩토리를 운영하고 있는 만큼, 트럼프 당선인의 강경한 대중 정책과 대치되는 행보를 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테슬라가 상하이 기가팩토리 건설을 위해 중국 은행에서 최소 14억 달러(약 2조원) 이상 대출받은 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국무장관으로 지명한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 역시 과거 테슬라가 중국 공산당을 옹호했다고 비난하면서
연방정부 기관과 중국 관련 기업의 계약을 제안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H-1B 문제를 놓고 트럼프 당선인이 일단은 MAGA보다는 머스크의 손을 들어준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진영내부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 인수팀과 가까운 소식통은 더힐에 “트럼프는 또 다른 알파(우두머리)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며 “곧 머스크에게 싫증이 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의미심장하다.
중국시장에 사활을 걸고 있는 머스크의 입지가 트럼프 행정부 안에서 어느 수준으로 유지될 것인지가 앞으로 미중관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본격 출범한 이후 미중갈등이 어느 수준에서 조율이 되느냐에 따라 브로드컴의 신화도 그 규모가 정해질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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