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웨이브 = 이용웅 주필
외환시장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 트레이드의 파장으로 봐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위협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선을 웃돈 것은 우리에게는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 경제 위기 상황을 연상시킨다.
원·달러 환율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고점을 높히는 추세를 보여왔다. 지난 4월 16일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무력충돌 이슈로, 9월 16일에는 연준의 금리인하 이슈로 각각 장중 1400원선을 상향 돌파한 적이 있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400원에 근접한 원·달러 환율과 관련해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환율 급등 사례를 소환해 관심을 모았다.
이 총재는 21일(현지시간) 미국외교협회(CFR) 초청 대담에서 “1997년 외환위기의 안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 있어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돌파했을 때 많은 비판을 받았다”며 “많은 사람이 미국 같은 곳과의 스와프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국제통화기금(IMF) 연차 총회 참석차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 중인 이 총재는 이처럼 고환율을 보고 외환위기의 경험을 소환하기도 했지만 크게 걱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 총재는 “1997년에는 원화가 하락하면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디폴트 리스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채무국이 아니라) 채권자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환율 하락이 대차대조표를 유리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으므로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2일(현지시각) 1400원 선에 육박하는 원·달러 환율 수준에 대해 “뉴노멀이라고 봐야 한다”라고 발언해서 이창용 총재의 발언을 훨씬 앞질렀다.
한국경제 투자설명회(IR)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 중인 최 부총리는 이날 뉴욕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달러당 1400원 선에 육박하는 현 환율을 뉴노멀로 봐야 하느냐’라는 기자 질의에 “현재의 1400원은 과거의 1400원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라며 이처럼 말했다.
최 부총리는 앞서 지난 7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업무보고에서도 “최근 환율 수준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강달러 현상”이라고 말해 일찌감치 고환율에 적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그때는 트럼프 대세론에 따른 강달러 전망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그러니까 최상목 부총리는 우리 원화만이 아니라 엔화, 위안화, 유로화 등 모든 통화에 비해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고환율을 특별히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셈인다.
그런데 경제 수장이 1400원을 위협하는 고환율을 ‘뉴노멀’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과연 적절한 발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창용 총재의 1400원 환율에 대한 언급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켜보자는 입장이라면 최상목 부총리의 ‘뉴노멀’ 발언은 1400원 이상으로 올라가는 환율에 미리 적응하라는 주문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출 부진, 성장률 쇼크...원·달러 환율에 부정적인 악재 쌓여가
국내외적으로 여러 요인이 한꺼번에 중첩돼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선 미국의 현상황을 보면 박빙구도의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승리가 점쳐지기도 하지만 설령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가 당선이 되어도 “이미 민주당 정책이 어느 정도 트럼프화되었다”는 평가에서 알수 있듯이 수출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경우 친기업 정책의 일환으로 대통령이 되면 법인세는 줄이면서 연방정부 지출은 지금보다 더 늘려갈 것으로 보인다. 법인세 인하 등 세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재정을 늘리려면 국채 발행이 많아지고 이는 가격 하락, 즉 채권 금리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금리가 오르면 글로벌 자본이 미국으로 유입될 수 있다. 이는 달러화 수요를 증가시켜 달러 강세로 이어진다는 것이 바로 트럼프 효과이다.
강달러 요인으로는 투기적인 요소도 가세하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국제금융센터는 상반기가 끝날 즈음 ‘중국의 위안화 평가절하 가능성 점검’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중국 전기차·반도체 등에 대한 관세를 큰 폭 인상한 것이 중국의 수출 경쟁력에 부담이 되고 있다”며 “일각에서는 10~20%의 위안화 평가절하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다”고 전했다.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 승리하기도 전에 이런 분석이 나왔는데 만약 트럼프 2기가 현실화되면 대중국 관세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위안화의 추가 하락이 불가피하고 이 때문에 국제 투기자본이 이미 위안화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는 시각이 상존하고 있다.
로이터는 “곰들이 트럼프의 승리에 대비하며 위안화 주위를 맴돈다(Bears circle China's yuan gearing for Trump win)”고 표현했다. 트럼프 승리 가능성으로 위안화 약세 베팅에 투기자본이 몰리고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는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하는 멕시코를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이라고 규정하고 대규모 관세 부과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는데 트럼프 집권이 가시화된다는 뉴스가 도배된 지난 21일 멕시코 페소화 가치는 급락했다. 이날 달러·페소 환율은 0.9% 넘게 뛰며 장중 20페소까지 급등(페소화 가치 하락)했다. 9월 초 이후 최고치다.
최상목 부총리가 말한 뉴노멀은 바로 이같은 국제적인 상황도 염두에 둔 발언인지 의심스럽다.
중국과 멕시코 등을 공격하려는 곰들(Bears)이 우리나라 역시 먹이감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산업연구원(KIET)은 24일 ‘트럼프 재선 시 통상정책 변화와 우리의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는 경우 대한국 무역 적자가 큰 승용차, 컴퓨터 부분품과 저장매체, 냉장고 등의 품목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보고서는 최근 3년간 미국의 대한국 무역적자 증가율은 연 평균 27.5%에 달해 트럼프의 강경정책의 대상에 우리나라가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 역시 중국이나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트럼프 집권시 미국과의 무역분쟁 여지가 많은 것이다.
문제는 우리 경제의 펀더멘탈에도 있다. 경기가 워낙 부진해 굳이 트럼프 대세론이 아니더라도 이미 원화 가치는 하방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때문에 트럼프가 대선에서 실패하고 해리스가 당선된다고 해서 원·달러 환율 1400원 의 우려가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 경제는 3분기에 0.1% 성장했다. 두 분기 연속 역성장을 피했다고는 하지만 실망스러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내수 회복이 부진한 가운데 그동안 우리 경제 성장을 이끌어왔던 수출이 전 분기 대비 감소하면서 향후 경기 흐름에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출이 전 분기 대비 감소한 것은 지난 2022년 4분기(-3.7%) 이후 처음이다.
비록 SK하이닉스가 3분기 영업이익이 7조300억원으로 사상최고를 기록했다지만 이에 앞서 삼성전자가 실적쇼크를 보여주었고 수출의 버팀목이었던 현대차는 3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대비 6.5% 줄었다고 한다.
글로벌 경제 상황이 점차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현대차 실적이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고물가, 고금리 추세가 약화되면서 3분기 민간소비는 0.5% 증가, 전 분기(-0.2%) 마이너스 성장에서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지만 8분기 연속 0%라는 저조한 모습에서 벗어날 기미가 없다.
이처럼 경제 전반이 추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판단하에 정부와 한국은행이 올해 성장률 전망치(정부 2.6%·한은 2.4%)를 모두 하향 조정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올해만 문제가 아니라 중국경제 부진, 가라앉지 않는 중동전쟁, 보호무역주의 팽배 등 여러 악재들이 겹쳐 내년에는 역성장마저 우려된다는 경고음도 들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상승 압력을 받고 있는 원·달러 환율의 상승 속도에 더욱 불이 붙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1400원 원·달러 환율, 수출기업엔 도움 안되고 수입물가는 올려
최 부총리의 지적처럼 강달러가 전세계적인 추세라면 1400원대 고환율이 우리 수출에 도움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고 수입물가만 자극해 인플레이션을 다시 한번 자극할 수도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고환율기인 1997년(외환위기), 2008년(미국발 금융위기), 2022년(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2023년에 무역적자를 기록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환기할 필요가 있다.
국제 무역분쟁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에 들어가면 고환율은 수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설령 트럼프 대신 해리스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해서 국제무역환경이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대규모기업집단의 경우 실질실효환율 하락에 대한 매출효과가 유의미하지 않게 보이는 반면, 수입비용 상승에 따른 비용효과는 기업의 영업이익률을 유의미하게 악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연구원은 실질실효환율이 10% 하락하면 대규모기업집단의 영업이익률은 0.29%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삼성전자, 현대차 등 주요 대규모기업집단의 수출전략이 점차 가격경쟁에서 기술경쟁으로 변화하면서 원화 가치가 하락했을 때 제품의 수출가격 하락을 통한 매출 증대와 같은 매출효과가 사라졌음을 시사한다.
이같은 현상은 비록 아무리 삼성전자 실적이 우려된다고 해도 외국인들의 집요한 삼성전자 주식 매도에서도 읽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외국인이 역대 최장인 32거래일 연속 순매도 행진을 이어가면서 24일에는 전일 대비 4.23% 하락한 5만6600원에 장을 마치는 등 연일 연중 최저가를 기록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환율 1400원이 뉴노멀이 되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에서의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곧 가뜩이나 저조한 국내 주식시장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이같은 국면에서 경제금융당국의 발언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우리나라 경제수장이 환율 상단 또는 하단을 쉽게 용인해주면 국제투기자본에 한국경제가 벌거벗은 모양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불안한 국제 금융상황에서 최상목 부총리의 “1400원 환율이 뉴노멀”이라는 발언은 자칫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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