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연예기획사 ‘하이브’와 자회사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와의 다툼이 국내를 넘어 국제적인 뉴스가 되는 것을 지켜보다 문뜩 80년대 중반쯤 기자가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기자는 당시 해운회사에 파견근무를 나간 경험이 있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대리급 선배가 미국 출장을 간다고 들떠 있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때만 해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아 대기업의 해외 비즈니스나 공무용이 아니면 미국 땅을 밟기 어려울 때였다.
대리급 선배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오드리 햅번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다. 거기에 나오는 뉴욕 풍경을 보면 흘러다니는 공기조차 자유롭게 느껴진다.”
그 사람은 1980년대 중반 엄혹한 군사정권의 칼바람 속에서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오는 주연배우 오드리 햅번, 조지 퍼타드를 보면서 부러움과 함께 우리나라의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랬나? 그 선배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불법이민을 선택한 것이다. 뉴욕의 티파니를 찾아가 오드리 햅번의 흔적을 찾았을까? 회사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다.
기자도 직장을 바꾸면서 몇 차례 해외 출장에 나섰는데 반드시 안기부 교육을 거쳐야 했다. 미국 비자를 받으려면 몇날 며칠을 기다려할지 모르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오히려 미국 굴지의 하버드대학 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한국 서울을 선택할 정도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그네들은 뉴욕 티파니가 아니라 서울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다.
그네들이 왜 한국을 찾는가? 바로 K팝과 K드라마로 대표되는 K컬쳐가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쿠바와 국교 정상화가 되었을 때 이를 가장 반기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쿠바의 젊은 K팝 마니아들이었다.
◇세계인의 마음 사로잡은 K팝 산업화의 주역들이 겪는 성장통인가
K팝, K드라마 등 이른바 K컬쳐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70~80년대만 해도 한국 영화를 보는 사람을 ‘고무신 관객’이라고 폄하하던 때를 생각하면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뀐 것이다.
당시에 한국 영화나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고무신 관객’이라는 딱지가 붙었다면 배우들이나 가수들에게는 ‘딴따라’라는 비칭(卑稱)이 주로 쓰여졌다.
‘타피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기타를 치며 부르는 'Moon River' 정도는 되어야 노래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이같은 풍경은 요즘이라고 해도 60대 이상 사람들에게는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지 62년생인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민희진 어도어 대표를 언급하며 “저런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은 괜찮고, 의사들이 노력을 통해 그보다 훨씬 적은 돈을 버는 것은 절대 안 된다며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것에 자괴감을 느낀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요즘에도 이런 말이 나올 정도이니 K컬쳐가 맹위를 떨치기 전에 우리 문화의 풍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해야 하나.
K컬쳐가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이 때 BTS를 세계에 알린 ‘하이브’와 자회사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와의 분쟁이 커지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돈이 있는 곳에 다툼이 따른다는 불변의 법칙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단순한 성장통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급성장한 K팝 산업이 어느 순간 정말 “누구도 실감하지 못하게” 망해갈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예고편이 될 수도 있기에 무심히 넘어가기 어려운 이슈같다.
뉴진스를 키운 민희진 어도어 대표는 “하이브와의 갈등은 '자회사 간 표절 논란'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하이브 산하 다른 레이블의 신인 걸그룹 아일릿(ILLIT)을 상대로 '뉴진스 베끼기' 의혹을 제기했다.
이 때부터 문제가 터진 것이다.
하이브는 그간 어도어를 비롯해 방탄소년단(BTS)이 소속된 빅히트뮤직과 쏘스뮤직, 플레디스, 케이오지, 빌리프랩 등 산하에 독립 레이블을 두고 운영했다.
하이브가 멀티 레이블 시스템을 운영하는 이유는 특정 대형 아티스트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음악적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큰 효과를 본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번에는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다른 레이블 소속의 아일릿이 자기가 키운 뉴진스의 컨셉을 그대로 카피했다고 해서 사건이 아주 크게 불거진 것이다.
미국 CNBC, 로이터, 영국 더타임스(The Times) 등 주요 외신들도 하이브와 민희진 대표 사이의 대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 음악 매체 빌보드는 “하이브가 레이블 어도어에 대한 감사를 시작하고 민희진 대표에게 퇴출을 요구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수사기관에 고발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은 “한국 최대 음악 회사가 소속 레이블 중 한 곳의 경영진이 이탈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해 감사를 벌였다”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수익성 높은 음악 산업 중 하나인 K팝에서 최근의 내분 사례”라고 전했다.
로이터는 K팝 산업이 단기적으로 “성장통”을 겪고 있다는 한국 증권가의 분석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이번 분쟁이 단순한 성장통으로 끝날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뉴진스, 아일릿이 이번 사태로 피해를 보면 K팝 전체에 위기
민희진이 뉴진스를 카피했다고 비난한 걸그룹 아일릿은 최근 데뷔 앨범 ‘슈퍼 리얼 미’ 공식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들은 K팝 데뷔곡 최초의 미국 빌보드 ‘핫100’, 영국 오피셜 ‘싱글 톱100’ 진입, 스포티파이 내 K팝 그룹 데뷔곡 최단기간 1억 스트리밍 돌파 등 말 그대로 데뷔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타이틀곡 '마그네틱'은 플럭엔비(Pluggnb)와 하우스(House)가 섞인 댄스 장르로 각종 숏폼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틱톡(TikTok), 인스타그램에서 '마그네틱'을 활용해 제작된 숏폼 콘텐츠 수가 100만 개를 돌파했을 정도다.
아일릿의 소속사 빌리프랩은 “아일릿(윤아, 민주, 모카, 원희, 이로하)이 프랑스 대표 더모 코스메틱 그룹 나오스(NAOS)의 대표 브랜드 바이오더마 모델로 활동한다”고 밝혔다.
아일릿은 데뷔하자마자 패션, 통신사, 음료 브랜드에 이어 벌써 네 번째 광고를 따낸 것이다.
아일릿의 윤아, 민주, 모카, 원희, 이로하는 소속사 빌리프랩을 통해 “데뷔 활동을 의미 있게 마무리할 수 있어서 기쁘다. 활동하는 내내 행복했고 꿈같은 시간이었다. 데뷔하고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 하루하루가 성장하는 시간이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모회사 하이브와 자회사인 어도어 민희진 대표 간 내부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뉴진스 역시 건재를 과시했다.
뉴진스의 '버블 검' 뮤직비디오는 공개 이틀 만에 조회수 1,000만회를 돌파했다고 한다. 특히 캐나다(1위), 영국(2위), 미국(3위), 호주(4위), 브라질(7위) 등에서 유튜브 인기 급상승 동영상 상위권에 오르며 인기가 글로벌 차원임을 증명했다.
세간에서는 민희진과 하이브의 갈등이 오히려 팬들의 관심을 끌어모은 결과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뉴진스는 또 6월 26~27일에는 일본 도쿄돔에서 팬 미팅을 여는데 이미 전석매진이다.
일본에는 최근 ‘뉴지오지’라 불리는 사회 현상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뉴진스를 보고 K팝에 빠진 40대 이상의 남성을 뉴진스 오지상(Newjeansおじさん, 뉴진스 아저씨)이라고 부르는데 줄여서 '뉴지오지'로 통한다.
이들 아저씨들이 뉴진스의 음악이나 춤 등을 커버하거나 공연 앞자리 표나 굿즈를 싹쓸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희진은 하이브와 갈등이 격화되자 “일본 돔 공연은 어찌 되느냐”고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건 민희진만의 걱정이 아니다. 일본 아저씨들 ‘뉴지오지’ 역시 걱정이 태산일 것이다.
방시혁과 민희진이 격렬하게 분쟁하면서 자기들이 키워냈다고 자랑하는 아일릿과 뉴진스를 벼랑 끝으로 몰고가면 그 책임은 또 누가 질 것인가.
어도어 부대표 A씨가 하이브 내부 재무자료와 아티스트 계약 자료를 유출하고 전략을 짰다는 (하이브의) 얘기가 맞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유출에 해당된다는 일부 법조계의 지적이 나온다.
반면에 반론도 있다.
가정법원 판사 출신 이현곤 변호사(사법연수원 29기)는 자신의 SNS에 '뉴진스 사건과 업무상 배임'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경영권 찬탈은 법적으로 의미 없는 주장”이라며 “어도어의 경영자는 법적으로 민희진이다. 민희진이 하이브의 경영권을 가지려고 했나?”라고 반문했다.
이처럼 수많은 언론들이 법조계 인사들을 취재하고 나섰지만 양측 어느 일방에 유리한 해석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일 것이다.
때문에 싸움이 진행될수록 더욱 진흙탕 형국이 연출될 것이고 그만큼 두 걸그룹이 입을 피해는 커질 수 밖에 없다.
이같은 갈등으로 하이브는 1주일 동안 시가 1조원이 증발했다. 갈등을 유발한 민희진의 어도어 매출은 1103억원이고 뉴진스 몸값은 261억원이라는 평가를 생각해보면 갈등의 손익은 금방 나온다.
때문에 “왜 이들은 싸우나?”라는 의심은 당연하다.
왕년의 명화 ‘대장 부리바’에서 야만족 수령 율 부린너가 적국인 폴란드 여자와 연분이 붙은 아들 토니 커티스를 자기 손으로 처단하면서 “내가 뿌린 씨앗은 내가 거둔다”고 명대사를 날렸는데 설마하니 방시혁이나 민희진이 아일릿과 뉴진스를 자기가 뿌린 씨앗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모처럼 K팝 르네상스를 가져온 주역들이 밥상머리를 다시 뒤집는 악역을 맡아서야 되겠는가.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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