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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이용웅 칼럼] 한동훈과 처칠, 전쟁 그리고 총선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우리는 상식적인 많은 국민들을 대신해서,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과 그 뒤에 숨어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운동권 특권 세력과 싸울 겁니다. 호남에서, 영남에서, 충청에서, 강원에서, 제주에서, 경기에서, 서울에서 싸울 겁니다. 그리고 용기와 헌신으로 반드시 이길 겁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해 12월 비대위원장 취임식 수락연설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의 1940년 6월 4일 하원 연설을 차용한 것이다.

 

처칠은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하늘에서도 나치독일과의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동훈 전 위원장은 “공포는 반응이고 용기는 결심이다(Fear is a reaction. Courage is a decision)”며 한 차례 더 처칠의 말을 빌렸다.

 

그리고 한동훈 전 위원장은 ‘동료시민’이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동료가 아닌 시민’도 있다는 소리이니 아무래도 전투적인 개념이 강했다.

 

그런데 한동훈 전 위원장의 이같은 수락연설을 접하면서 국민의힘 명운이 달린 총선을 앞두고 하필이면 왜 처칠의 예를 들었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처칠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지만 샴페인을 터트리기도 전에 총선에서 패배, 잠시 정계에서 물러나야 했던 아주 희귀한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 22대 총선을 전쟁 개념으로 접근한 국민의힘이 빠진 인식의 오류

 

처칠에 매료된 정치인은 한동훈만은 아니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처칠 어록을 많이 인용했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 SBS라디오에 나와 “(영국에서) 나치와 타협하자는 정치권의 요구가 많았는데 (처칠 전 총리가) 국민들을 설득해 자유민주라고 하는 무너질 뻔한 질서를 회복시켰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더 나아가 지난해 국회에서 열린 추가경정예산안 관련 첫 시정연설에서 '처칠과 애틀리의 파트너십'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이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은 22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가 아니라 전쟁에 임하는 자세를 취한 셈이었다.

이같은 인식은 야당을 나치와 대치(代置)시키는 ‘인식의 오류’에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것은 선거 캠페인 중에 조국을 히틀러에 비유한 한동훈의 어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를 굳이 전쟁과 비유하자면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승리했기에 이미 2차대전에서는 승리했고, 그 다음으로는 총선이라는 정치 영역에서 승리해야 하지 않았을까.

 

전쟁은 이미 끝났고 ‘전쟁 이후의 재건’에 힘써야 했던 국민의힘 지도부는 여전히 ‘전쟁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이번 총선 참패의 진짜 이유는 아니었던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여름 영국에서는 총선이 치러졌다.

 

처칠은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국의 새 대통령 트루먼,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독일에 대한 전후 처리와 일본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 전개된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는 바람에 처칠은 포츠담 회담을 다 끝내지 못하고 신임 수상 애틀리에게 회담 자리를 넘겨주고 영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은 “미래를 마주하자”(Let Us Face the Future)라는 구호를 내걸고 총선이 임했다. 산업 국유화, 국가 주도의 경제 복구, NHS 설치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특히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종합적 보건의료서비스를 전 국민에 대해 무료·무차별로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했다.

 

영국 국민들은 1차 대전 이후 극심한 공황을 겪었던 악몽을 떠올리면서 2차대전이 끝난 뒤에 어느 정도의 불황이 찾아올 지 전전긍긍 상태였는데 처칠은 승전고만 울려댔지 전후 경제 부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반면에 노동당은 사회안전망을 구축해 그 어떤 불황이 찾아와도 국민들이 삶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 주효했다.

 

노동당의 승리는 압도적이었다. 노동당은 의석수가 두배 넘게 급증했다. 종전의 154석에서 239석을 늘린 393석을 차지한 것이다. 반면 보수당은 387석에서 190석이나 줄어들어 197석을 얻는데 그쳤다.

 

처칠은 승전이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적표를 들고 총선은 그저 무임승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선거를 앞두고 집권 보수당 인기는 떨어졌지만 처칠 개인의 지지율은 80%를 넘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영국 유권자들은 “미래를 마주하자”는 노동당의 구호에 더 환호했다.

 

장기간 지속된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영국 국민들은 고통과 불안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쉬고 즐기고 여유를 만끽하는 그런 삶을 원했던 것이다.

 

노동당은 영국의 사회구조를 ‘사회정의’라는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개념에 점진적으로 혁명을 통하지 않고 적응시켜 감으로써 하층 계급의 생활을 보다 윤택하게 하려 했던 실용적인 급진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처칠은 여전히 전쟁중이었고 독일에 이어 일본도 끝장을 내야 한다면서 미래 준비에는 소홀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영국 국민들은 노동당의 구호처럼 현재보다는 미래에 표를 던진 것이다.

 

◇국민의힘, 1945년은 물론 1951년 영국 총선에서도 배움 얻어야

 

1945년 총선을 노동당 승리로 이끈 애틀리는 전쟁 중에는 처칠과 찰떡궁합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영국 총리에 취임한 보수당의 처칠은 영국이 존망의 갈림길에 서자 노동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했다.

 

당시 노동당 당수였던 애틀리는 1945년까지 이어진 전시 내각에서 부총리 등을 지내며 처칠을 보좌했다. 애틀리는 나치 독일과의 협상을 주장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당 장관들을 질책하면서 처칠에게 힘을 싣기도 했다. 애틀리는 “처칠이 없었으면 영국이 패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이 언급한 처칠과 애틀리의 협업은 바로 이같은 상황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물론 지난 대선 이후 우리 정치는 이같은 협업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정치는 결국 포기하지 않은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 같다.

 

1945년 총선 패배 이후 절치부심하던 처칠은 1951년 조기 총선에서 321대 295로 승리,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 내각의 뒤를 이어 다시 보수당 내각을 이끄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처칠의 재집권은 안정적으로 상당 기간 이어졌다.

 

우리가 전쟁영웅으로만 기억하는 처칠은 사실 제국주의자였다. 그는 절대 인도의 독립을 용인하지 않았지만 영국은 노동당 집권하에서 이미 인도를 포기하고 대영제국이 사실상 해체되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하지만 처칠은 1951년 재집권한 이후 노동당이 그동안 이뤄낸 업적을 뒤집지 않았고 보완, 영국사회를 더 이상 혼란에 밀어넣지 않았다. 불꺼진 대영제국의 횃불을 되살리려고 무리하지 않았고 영국 사회를 ‘제국주의 대영제국이 아닌 아닌 보통의 선진국’으로 재건하는데 힘을 보탠 것이다.

 

2기 처칠 내각은 보수당 독재가 아니라 협치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처칠은 1947년 공식 합당한 거국파 자유당 출신의원들에게는 내각을 나눠주었지만 당내 강경 우파, 카르텔을 형성한 금융권 인사들은 배제했다.

 

처칠은 애틀리의 노동당 정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우호적이었다.

 

이는 처칠이 이긴 선거에서 의석수 분포에서도 알수 있듯이 여와 야의 지지율이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처칠은 노동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마음도 충분히 헤아렸다.

 

처칠은 노동당의 복지정책을 유지하면서 서민용 주택공급은 오히려 확대했다.

 

1954년 2월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는 2차대전 이후 형성된 보수당과 노동당의 정책적 합의의 기조를 ‘버츠컬리즘’이라 불렀다.

 

처칠은 선거에 승리한 이후 외교에 전념하고 내치는 재무부 장관이었던 버틀러(Rab Butler)에 맡겼다. 버틀러는 그의 상대역이라 할 수 있는 노동당 예비내각(새도우 캐비넷)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게이츠컬(Hugh Gaitskell)과 경제정책에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해서 언론은 두 사람의 이름을 합성해 "버츠컬리즘"이란 용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경제·노동·복지 등 모든 분야에서 좌와 우로 입장과 정책을 달리했던 두 당이 케인즈주의와 복지국가를 받아들이고 상당한 정도 정책적 수렴을 이뤄낸 것이다.

 

처칠은 이처럼 사회적 안전망 확보는 그대로 유지한 채 기업 규제는 대폭 완화해 경기활성화를 도모하고 1949년에 50%였던 소득세를 1957년 22.5%까지 인하하는 등 감세정책을 병행하기도 했다.

 

처칠은 재집권 이후 ‘좌회전 깜박이를 키고 우회전을 하는’ 노무현 식 정치와 비슷하게 ‘우회전 깜박이를 키고 좌회전을 하는’ 정치로 마무리했다.

 

대선이든 총선이든 선거를 과연 승자독식의 전쟁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처칠을 좋아하고 인용하는 것에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처칠을 영국 국내 정치와 연계해서 읽지않고 하필이면 전쟁에 몰입중인 처칠의 모습만 바라본 것은 아닌지 지극히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정치인들이 보수당 처칠과 노동당 애틀리의 기나긴 협업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란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5.4%포인트 차이로 입법부를 장악했다고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불과 0.7%포인트 차이로 행정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던가.

 

처칠은 321석으로 재집권한 이후 295석을 얻은 야당을 배려해 ‘정책의 통합’을 추진했다.

 

국민들은 선거에서 패배한 윤석열 정부의 통합 노력에도 주목할 것이지만 범야권의 협치 노력이 어떻게 전개될지에도 관심을 줄 것이다.

 

정치는 결국 돌고 도는 것이고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도 결국은 함께 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이번 총선이 확인해준 것은 아닌지...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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