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웨이브 = 이용웅 주필
탄핵정국으로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 1500원을 넘볼 기세를 보이자 오래전 박지원 의원을 사석에서 만나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박지원 의원은 외환위기를 겪은 뒤 김대중 정권이 출범할 때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박 의원은 당시 외환위기라는 엄혹한 상황에서 기업인들과 김대중 대통령의 만남을 수시로 주선하고 동석했다. 때문에 우리 대기업 회장들의 면면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박지원 의원은 당시 만난 기업 총수들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대선에도 나온 사람이기에 정치인들을 아주 우습게 보았다. 나로서도 그 사람에 대해서 좋은 감정은 없다. 그런데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는 정말 뭔가 ‘썸씽’(Something)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에게 나는 ‘열정’ 그 자체를 보았다.”
박지원 의원이 이건희 회장에게 ‘썸씽’(Something)이 있었다고 한 것은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번득였다는 표현이었다.
나중에 그룹이 해체되면서 비운의 주인공이 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단기간에 외환위기 극복이 가능하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한 것을 그리 표현한 것이었다.
김우중 회장의 그같은 주장은 단순한 희망고문만은 아니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한국 경제를 급습하면서 IMF 관리체제로 넘어가 환율변동폭 제한을 없애자 원달러 환율은 2000원까지 급등했다.
이렇게 되자 가뜩이나 외화부채에 시달리던 한국 경제는 더욱 큰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김우중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한 대목은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같은 고환율이었다.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장으로 마지막까지 김우중 회장을 보필했던 좌승희 박사는 이런 저런 토론회에서 김 회장의 특별지시에 따라 ‘경제위기 타개를 위한 경상수지 흑자 확대 방안’을 공개했다.
당시 정부가 IMF 처방에 따라 고환율 정책을 펼 때였으니 수출금융 지원 등을 제대로만 해주면 500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도 가능하다는 게 핵심이었다.
대우그룹은 실제 수출금융 지원도 받지 않았음에도 1998년에 143억 달러, 국가 전체로는 416억 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를 이뤄내 외환위기 극복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치솟은 환율이 수출기업에 도움을 주었고 결국 외환위기 극복이 가능했던 것이다.
◇1500원 환율이 ‘빅피겨’가 되는 시대, 물가 오르고 성장률은 0%로 수렴되는 스태그플레이션 경고음
느닷없는 계엄과 이에 따른 탄핵정국으로 1400원을 뚫은 환율은 이제 1500원을 향해 질주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
김찬희 신한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보고서룰 통해 “강달러 압력으로 원·달러 환율은 1400원 초반에서 하방 경직적 흐름을 이어갈 전망”이라며 “탄핵 정국 전개에 따른 정치 불확실성으로 달러화 수요 우위는 지속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계엄과 탄핵이 거론되기 이전부터 이미 1500원 환율 시대가 도래한다는 보고서는 나오기 시작했다.
노무라증권은 지난 11월 13일 보고서에서 “외환 관련 대외 압력과 상대적으로 적은 외환 보유고를 고려할 때 한국은행이 현재 1400원대 환율을 강력하게 방어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달러-원 환율이 내년 5월 중반 1500원대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보고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시장 관심은 관세와 감세에 집중될 것이라며 미 국채 금리와 달러 가치가 오를 것으로 내다보면서 중국에 60% 관세를 실제 부과할 경우 달러-위안 환율은 내년 2분기 7.60위안까지 치솟고 원화는 상당한 약세 압력을 받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3일 윤 대통령이 비상 계엄을 선언하자 원·달러는 1~2시간 만에 40원 넘게 급등하며 1446.5원까지 치솟았다.
이제부터는 환율이 1500원을 터치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됐다.
지난 7일에는 오전 한 때 국민의힘이 탄핵 소추에 사실상 찬성하는 쪽으로 선회하자 장중 20원 치솟으며 1429.2원까지 급등하다가 9.1원 오른 1419.2원에 거래를 마쳤다.
아다르쉬 신하 BoA 아시아 금리 및 외환 전략 공동 책임자는 7일(현지시간)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표결 불발로 원화 가치가 급락할 가능성이 크다. 탄핵 실패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더 오래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불안뿐만 아니라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도 원화에 하방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가뜩이나 저성장에 시달리는 한국경제에 ‘환율 1500원 시대’는 외환위기 때처럼 수출에 도움이 될 것인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대규모기업집단의 경우 실질실효환율 하락에 대한 매출효과가 유의미하지 않게 보이는 반면, 수입비용 상승에 따른 비용효과는 기업의 영업이익률을 유의미하게 악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산업연구원은 “실질실효환율이 10% 하락하면 대규모기업집단의 영업이익률은 0.29%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규모기업집단의 수출전략이 점차 가격경쟁에서 기술경쟁으로 변화하면서 원화의 가치가 하락했을 때 제품의 수출가격 하락을 통한 매출 증대와 같은 매출효과가 사라졌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김우중 회장이 고환율로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을 때와는 지금 우리 경제 사정이 너무 다르다.
아무리 환율이 올라도 중국산 제품이 품질과 함께 가격으로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 제품이 가격만으로 수출메리트를 얻기는 어렵다.
한때 우리나라 산업을 이끌었던 중후장대 산업은 그렇지 않아도 경쟁력 상실에 시름하고 있는 터에 고환율의 직격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철강·항공·석유화학·이차전지 기업 등은 고환율에 따른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전망이다. 최근 롯데그룹을 위기상황으로 몰고간 롯데케미칼 등이 이 산업군에 속한다. 석유, 리튬, 니켈, 철광석 등 산업 핵심 원자재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항공업계는 연료비와 항공기 임차료를 달러로 지출한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환율이 10% 오르면 국내 제조업 원가는 3.68%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포스코, 현대제철 등 철강 업계는 환율이 요동칠 때마다 철광석 같은 원자재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를 수밖에 없어 근심이 깊어지고 있다.
대외채무 악화도 우려된다. 원화값이 떨어지면 기업들이 부담해야 할 외채가 눈덩이처럼 늘어날 것이다.
올해 9월 한국의 비금융기업 대외채무 합계는 1761억5100만달러(약 246조6110억원)로 집계됐다. 지난해 동기보다 102억8900만달러(약 14조4040억원) 늘어났다.
환율 상승은 당연히 물가를 끌어올린다.
한국은행은 환율이 1400원 위로 올라가면서 3개월 연속으로 1%대를 기록한 물가상승률이 다시 12월에는 2% 부근까지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식품 업체들이 밀가루·팜유·설탕처럼 수입 의존도가 높은 원재료 가격이 환율 변동에 따라 치솟는 것에 밤잠을 설치고 있는데, 이는 곧 국내물가에 전이돼 가뜩이나 위축되고 있는 내수기반을 위협할 전망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6일 공개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정치 혼란에 따른 경제적 영향이 중국과의 경쟁 심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 부과가 한국 수출업체에 미칠 잠재적 영향에 비하면 “제한적”이라고 밝혔다.
이 총재는 “내부적 요인에 비해 외부적 요인이 현재 우리(한국)에게 훨씬 더 큰 불확실성을 주고 있다”고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
◇ 준예산까지 거론되는 혼돈의 예산안, 예비비 삭감은 환율방어에 부정적 영향
이창용 총재 말대로 내적 요인이 경제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정부가 제대로 돌아갈 때 이야기다.
8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한덕수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이 외교나 내정에 일체 관여안하고 두 사람이 힘을 모아 정국을 안정시키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부정적인 기류가 강하다.
8일 연합인포맥스에 따르면 코스피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는 비상계엄 사태 직후인 지난 4일부터 6일까지 사흘간 총 1조85억원을 순매도했는데 특히 금융업종에 집중됐다.
외국인 투자자의 금융업종 순매도는 지난 4일 2551억원, 5일 2786억원, 6일 1759억원 등으로 총 7096억원에 달했다.
올해 들어서 금융업종 순매도가 이틀 연속 2000억원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외국인들이 국내 주식 가운데 특히 금융주를 집중 매도하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국내 금융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확대되는 것은 환율에 결코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한덕수 총리는 이와 관련 “비상시에도 국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예산안과 부수법안의 통과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면서 “예산안이 조속히 확정돼 각 부처가 제때 집행을 준비해야만 어려운 시기, 민생경제를 적기에 회복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정국 상황은 여의치 않다.
현재 예산안은 야당이 정부안에서 4조1000억원을 삭감한 '단독 감액예산안'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처리한 후, 우원식 국회의장은 10일까지 예산안 관련 합의를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무기한 중단된 상태이다.
민주당은 앞서 국회 예결위 전체회의에서 △대통령실과 검찰의 특수활동비, 특정업무경비 △대왕고래 프로젝트(동해 심해 가스전)와 전 국민 마음 투자 지원 예산 등 윤석열·김건희 예산 △정부 예비비 등을 대거 삭감한 수정안을 의결한 바 있다.
특히 예비비의 경우 야당은 정부가 제출한 4조8000억원 규모의 절반에 달하는 2조4000억원을 감액했다.
민주당은 여기에 더해 8일 예산안에서 7000억원을 추가로 삭감하겠다는 방침을 새롭게 세웠다. 주로 대통령실 운영비용이다.
아무리 대통령 권한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라고 하지만 야당 주도 예산안을 두고 여야대립이 다시 격화될 수도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민주당은 감액 예산으로 국민을 상대로 협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지금 여당의 추경호 원내대표는 대표직 사의를 표명한 상태이고 야당에서는 내란 동조자로 규정한 상태이다. 누가 나서 야당과 예산안 합의를 이끌어낼 것인가.
우원식 국회의장은 내년도 예산안 처리 지연 우려에 “(합의 시한을) 10일로 정했는데 그동안 국헌문란 중대한 사태 발생으로 사실상 민생이 놓쳐지고 있는 것 아니겠나”라며 “국회의장이 민생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조속한 시일 내 처리할 수 있도록 방안을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예산안 혼선은 결국 내년 각종 돌발변수에 정부가 대응할 수 있는 손발이 묶이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 뻔해 이 또한 고공행진을 하는 환율에는 부정적인 요소이다.
특히 예비비의 경우 최악의 순간 환율 방어로도 쓰이는 항목이다. 때문에 예비비 삭감은 치솟는 환율에는 분명 악재로 작용할 것이다.
정부는 그렇지 않아도 세수결손으로 인해 환율 방어에 쓰이는 외평기금에서 4조원에서 6조원 규모를 전용한 상태이다.
외평기금 소진에 예산안 실종까지 내년에는 환율 방어를 위한 모든 수단이 막힐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예산안이 파행을 거듭해서 준예산이 편성되면 공무원 인건비, 국고채 이자, 국민연금, 아동수당, 생계급여 등 기본적인 예산 집행만 가능하다.
탄핵정국이 하루라도 빨리 정리되지 않으면 경기는 후퇴하고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한국경제를 집어삼키는 ‘퍼펙트 스톰’을 피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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