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웨이브 = 이용웅 주필
27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총선)에서 자민당 연립정부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공명당과 연립한 자민당 정부가 과반 확보에 실패한 것은 15년만이다.
당연히 향후 일본 정국은 안개속을 헤매게 됐고, 윤석열 정부가 적극 추진해 온 한미일 공조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관심도 높아지게 됐다.
게다가 코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현실화될 경우 동북아 정세는 또한번 격랑 속으로 들어갈 판이다.
더군다나 현재 국제정세는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가운데 대만 해협의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191석을, 공명당은 24석을 얻어 총 215석인데, 중의원 과반인 233석에는 미치지 못했다.
자민당 비자금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략한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기존 98석에서 148석으로 크게 약진했다.
지난해 연말 불거진 자민당 '비자금 스캔들' 파문이 큰 영향을 미쳤지만 역시 고물가에 따른 실질임금 감소 등 경제난이 결국 일본 정치지형도를 바꾸는 마침표를 찍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지난 1일 취임한 이시바 총리는 조기 총선을 치르는 승부수를 던졌으나 선거 패배로 자충수가 되면서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이번 선거에서 사실상 승리한 입헌민주당 노다 요시히코 대표는 오래전부터 정권교체를 주장해왔지만 현재의 의석 분포로는 단독으로 정권교체까지는 어렵고 총리지명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그렇다고 해도 노다 대표는 10년 넘게 절치부심한 끝에 이번 총선을 대승으로 이끌며 화려하게 부활,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노다 대표는 2012년 민주당 정권 때 세 번째로 총리에 올랐지만 1년3개월 만에 자민당에 정권을 내주면서 단명 총리로 끝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자민당이 일단 제1당 지위는 유지한 만큼 무소속 의원 영입, 일부 야당과 연계를 통해 연립 정부를 확대할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자민당이 추진해 온 대내외 정책에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여지고, 이에 따라 윤석열 정부의 대일본 정책도 크고 작은 변화에 부딪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포퓰리즘 공약 난무한 일본 선거의 후유증은
IMF는 지난 22일 발표한 '세계경제전망'(World Economic Outlook) 보고서에서 올해 한국의 1인당 GDP를 3만6132달러로 추정했다.
반면에 올해 일본의 1인당 GDP 추정치는 3만2859달러로 지난해(3만3899달러)보다 3.1%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한국의 국민소득이 2년 연속 일본을 앞설 것이라는 이야기다.
일본은 그동안 장기간 저임금에 시달려온데다 최근 물가가 크게 올라 서민 생활고가 가중되어 왔다.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각 정당들은 모두 최저임금을 올리고 물가를 잡겠다는 공약을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대표적인 공약이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다.
올해 일본 최저임금은 역대 최대폭인 51엔 인상돼 전국 평균 시간당 1055엔(약 9600원)이다. 한국은 올해 기준 최저임금이 시급 9860원이고 내년에 1만30원이 된다.
일본이 사상 최대치로 최저임금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보다 낮은 수준이다.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을 비롯해 공명당, 입헌민주당 등 많은 정당이 선거 공약 중 하나로 2020년대 최저임금 시급 1500엔(약 1만3700원)을 내걸었다.
이제까지 일본 정부는 1500엔 시대를 2030년대 중반에 달성하겠다고 했는데 이것을 2020년대로 앞당기겠다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물가 차이 등을 고려해 구매력 평가로 환산한 일본의 최저임금은 2022년 기준 프랑스와 독일보다 40% 가까이 낮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은 일본 정당들이 그저 표를 얻기 위해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고 있다고 불만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난이 지속되면서 노사관계에도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NHK가 지난 18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일본 최대 노동조합 조직인 렌고(連合·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가 내년 봄철 임금협상인 춘투(春鬪)에서 임금 5% 이상 인상을 요구하기로 했다.
렌고는 반면에 중소기업 노조는 6% 이상의 임금 인상을 목표로 삼기로 했는데 중소기업 노조에 별도로 더 높은 임금 인상률을 요구하는 것은 2014년 춘투 이후 처음이라고 NHK가 전했다.
그만큼 일본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매우 낮은 상황임을 입증하는 사례이고 그동안 조용한 모습만 보였던 일본의 노사관계가 앞으로 격랑 속으로 빠져들어갈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금리도 변수이다. 이번 선거의 이슈 중 하나가 물가급등인데, 물가를 잡으려면 금리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제로금리에서 탈출한 일본이 계속 금리를 우상향시킬지에 대해서는 여러 변수들이 상존한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금리 인상에 대한 질문에 “일단 시간적인 여유는 있다”며 “미국 경제가 일본 물가에 어떻게 영향을 줄지 지켜볼 것이다”고 말했다.
일본은행은 지난 3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정책금리를 17년 만에 올리며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종료했다. 일본 금리에 대해 나라안팎 전망은 12월 인상이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 확보에는 실패했어도 결정적 강자가 나타나지 않아 최저임금과는 달리 금리정책은 다시 한번 오리무중에 빠져들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모든 당이 공감하고 있는 최저임금 인상과는 달리 금리인상과 같은 정책은 보다 복잡한 정책조합이 요구돼 단일대오 같은 모습을 보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 물가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은 바로 쌀값 급등이다. 최근 일본 전국의 주요 산지 가격이 약 20%에서 40% 정도 상승한 것이다.
작년에 2200엔에 달하던 5kg짜리 평균 도매가격이 올해는 약 3500엔으로 크게 올랐다. 한국보다 거의 2배 수준이다.
이처럼 일본 쌀값이 크게 오른 이유로 지난해 폭우와 고온 현상이 계속 이어지면서 흉작으로 쌀의 생산량이 줄어든 데다 일본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이 급증하면서 쌀소비가 크게 늘었다는 요인들이 거론되고 있다.
오카산증권의 수석 채권 전략가 나오야 하세가와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야당과 여당이 임금 인상 조치를 요구하고 있어 내년 임금 상황이 더 명확해질 때까지 일본은행이 금리 인상을 단행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임금을 올려봤자 금리를 같이 올리게 되면 실질소득 삭감 효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정권교체까지 넘보는 입헌민주당의 공약 살펴보니
이번 선거에서 영향력을 확대한 입헌민주당은 공약집에서 ‘두꺼운 중간층(중산층)’ 부활, 최저임금을 시간당 1500엔 이상으로 올림, 남녀 간 임금 격차 해소 등 다소 진보적인 대서민정책을 내놓으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소득세, 법인세 등 세제를 개편해 고소득 개인, 수익 많은 기업의 세율 인상을 검토한다”고 강조했다.
집권을 꿈꾸는 야당의 이같은 정책이 이번 선거에서 약진을 바탕으로 일본 정치풍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거리이다.
또 이번 선거결과에 따라 이시바 총리가 그동안 지론으로 내세워왔던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실현 가능성은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야당인 입헌민주당은 이번 선거공약에서 “비핵 3원칙 견지. 유일한 전쟁 피폭국으로서 핵무기금지조약에 옵서버로 참가하는 등 핵 폐기 위해 노력한다”고 강조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은 핵 공유는 불허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핵과 관련된 정책에서는 입헌민주당은 자민당과 완전히 결이 다르다.
자민당은 “탄소중립 실현과 에너지 안전보장 확보를 위해 원자력 등 탈탄소 효과가 높은 발전 방식을 최대한 활용하고 안전성 기준을 충족한 원전은 지자체 등 관계자 이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재가동을 추진한다”는 공약을 제시했다.
하지만 입헌민주당은 “원전 신설·증설을 불허하고 원전 폐기 작업은 국가 관리 하에서 하는 체제로 한다”는 비핵·반핵 입장을 분명히 했다.
외교 안보 정책과 관련해 자민당은 “중국·러시아의 힘에 의한 현상변경 시도가 분명해지고 대만 유사(有事·큰일)가 현실의 과제가 되는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엄중한 안전보장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3대 안보문서에 근거해 방위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한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니까 자민당은 기존 평화헌법의 틀을 건너뛰는 적극적인 군사정책을 추진해왔다.
이에 반해 입헌민주당은 공약집에서 “전수방위(專守防衛·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방위력 행사 가능)에 기초해 일미 동맹을 축으로 안정적인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자민당의 군사안보정책이 일본 방위를 넘어서는 지역방위 개념으로 넘어가는 것이라면 입한민주당은 어디까지나 ‘전수방위’의 선을 지키겠다는 입장이다.
앞으로 일본 정치가 내부 혼돈에 빠져 대북 정책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국제적인 변동상황에 대해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윤석열 정부와 그동안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춰왔던 일본 대외 정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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