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웨이브 = 이용웅 주필
요며칠 계엄령 이야기가 매일 나오는데 그런 소리를 듣자하니 참으로 기묘한 느낌이다.
계엄이라는 말 자체가 풍기는 아주 고약하고 어쩐지 으스스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범야권 내부에서 예전부터 윤석열 정부가 계엄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들이 오고간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여야 대표회담을 앞두고 “최근 계엄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고 발언해 본격적으로 불을 지폈고, 게다가 야당 의원들 체포계획도 들었다고 했다.
여기서 이재명 대표가 거론한 국회의원 체포는 이승만 정권 시절 부산 정치파동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기이하기는 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재선을 위한 개헌 작업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또 야당의원 47명을 국제공산당 조직에서 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했다.
지금 여권에서 계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수십년전 부산 정치파동을 모델로 삼아 작전을 그대로 짜고 있다는 것인지...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은 지난 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계엄 논란의 핵심이자 하나회 이후 최초의 군기문란 파벌, 충암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올해 초 방첩사에서 방첩사령관 등 충암고 출신 4인 비밀회동을 했다. 충암파 김용현 국방장관이 최근 경호처장 공관에서 방첩사·수방사·특전사령관과 비밀회동을 가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계엄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있다는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야 모두 “그렇다면 토론회를 하고 서로 직을 걸자”는 말이 오고가는 아주 해괴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 기억으로는 계엄이라는 것이 상당히 무서운 것인데 토론을 해서 진위 여부를 가리자고...
하여간 기묘하기 이를 데 없는 2024년 대한민국의 정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재소환된 1979~1980년 계엄령의 기억들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의 기억을 되돌리자면 지금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계엄에 대한 여러가지 기억들이 중첩된다.
1979년 어느날 아침 정말 느닷없이 ‘박대통령 유고(有故)’ ‘박대통령 서거(逝去)’라는 시커먼 제목의 신문 기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1980년 봄이 되어 정국이 소용돌이치면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싯구가 인구에 회자되더니 5월 18일 아침이 되자 ‘비상계엄 전국확대’라는 제목의 신문들이 일제히 모든 가정에 배달이 됐다.
당시 기자는 대학 초년 시절이었는데 “왜 계엄령이 전국에 확대되느냐. 그 전 계엄령은 그렇다면 무슨 내용이라는 말이냐”는 의문이 있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라는 신문 제목이 눈길을 확 끌었기 때문이다. 뭔가 더 긴박한 느낌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애초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당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왜 제주도를 제외했는지 의아하다는 생각이 이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법률상으로는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계엄령일 경우에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인적 행정적인 것으로 통제하지만 제주도를 빼면 부분계엄령이 되어 국방부 장관이 계엄사령관을 통제하는 시스템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주도를 뺀 부분 계엄령일 경우에는 군인이 아닌 국무위원인 국방부장관이 계엄사령관을 통제하는 ‘문(文)이 군(軍)을 통제하는’ 시스템이 유지된다는 의미심장한 뜻이 숨어 있었다.
이쯤 되면 몇 년전 공전의 히트를 한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이 계엄사령관을 불법으로 체포하는 만행을 저지를 때 이에 반발한 참군인 이태신이 반격해 들어오자 숨어있던 국방부 장관을 내세워 이태신 병력을 무력화시키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이해가 될 것이다.
서열상 위인 국방부 장관이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하극상이 아니라 부분계엄하에서 합법적인 절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는 국무위원인 국방부 장관을 명령 체계에서 제외시키고 계엄사령관이 허수아비 대통령을 빼면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는 그런 무서운 내용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충암파가 무소불위의 하나회도 어려움을 겪은 비상계엄령을 준비한다는 제보의 현실성은
우리가 역사를 한줄 짜리로 외운다면 10.26에서 12.12을 거쳐 5.18로 이어지는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가 말 그래도 한줄 정리가 가능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다만 내가 있는 동안은 계엄령이 (제주도를 뺀) 지역계엄이란 말이야. 지역계엄이란 무엇이냐. 계엄사령관이 정상적인 내각, 장관을 통한 행정명령 계통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이 말이야. 말하자면 총리의, 장관의 부하로써 지휘명령을 받으면서 움직인다 이 말이야”
신군부의 정권 탈취과정을 지켜본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회고담이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10.26 당시 최규하 당시 권한대행에게 전국계엄이 아니라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계엄을 제언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니까 군사정권의 등장을 지체시킨 민간인 국무위원이었다.
이쯤 해서 계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느낄 수 있다. 대통령 암살이라는 엄중한 상황에서도 당시 민간인 국무위원들은 군정으로 바로 이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부분계엄령’이라는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했다.
전두환 당시 신군부실세가 막강한 하나회를 무기로 삼아 정권을 탈취하는데 수개월이 걸렸고 광주민중항쟁이라는 큰 비극의 강을 지나서 완성이 됐다.
그러니까 군내 고위직을 윤석열 대통령과 동문인 충암고 출신 인물들이 몇 명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계엄선포가 가능하다고 믿어야 할 이유를 찾기는 참 어렵다.
하다못해 전두환 전 대통령마저 임기 말기 10월 항쟁이라는 무시무시한 시민 저항을 앞두고 비상계엄 선포를 염두에 두었지만 당시 민간 국무위원들은 물론이고 하나회 일색으로 채워진 군부의 동의를 얻기도 어려웠다.
이후 등장한 노태우 대통령 역시 ‘여소야대’라는 엄중한 상황에서 계엄선포는 꿈도 못꾸고 ‘3당합당’이라는 절묘한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했다.
지지율 20%대의 윤석열 정부가 계엄을 준비한다는 야당의 주장이 뭔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계엄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야권 정치인들은 지금도 계엄음모론을 마음껏 주장하고 시중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도 큰 목소리를 내면서 “그 놈들이 계엄을 준비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떠들 수 있는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집필해 유명해진 주제 사라마구의 후속작 이름이 ‘눈뜬자들의 도시’이다. 여기에 계엄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날 투표를 해보니 전체 표의 80% 이상이 백지로 나왔다. 정부는 이것을 국민적 저항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곳곳에 정보요원들을 풀어 백지투표의 이유를 알아보지만 알 도리가 없고 오히려 정보요원들조차 백지투표를 한 사실이 드러난다.그러자 아예 계엄령을 선포하면 폭동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 그래야 가혹한 진압으로 무언의 저항을 하는 시민들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의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보다 더 평화롭게 지낸다. 이건 아니다 싶은 정부는 이제는 지하철에 폭탄을 설치해 마치 폭도들이 이 일을 꾸민 것처럼 속인다. 그러나 시민들은 정부가 이 짓을 벌였다는 것을 알고 추도를 한다. 이번에는 불안감을 느낀 우파 지지자들이 도시를 탈출한다. 그러자 정부는 좌파들이 우파들의 집을 약탈할 것이라고 선동하지만 시민들은 되돌아온 우파들을 오히려 지원한다."
소설의 결말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2024년 대한민국은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눈을 오래 뜨고 있는 사람들의 도시’로 변한 지 오래됐다.
그런 도시에시 계엄이라는 상황이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은 좌우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계엄은 계속 화두로 남을 것이다. 그게 지금 우리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여권에서는 가을로 예정된 이재명 대표의 1심 판결이 유죄로 나오는 것에 대비해 민주당이 방탄용으로 계엄론을 띄운다고 의심한다. 그리고 나아가 윤석열 정부의 탄핵을 위한 빌드업 작업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계엄이라는 것이 원래 초법적인 폭거이니 국민의힘이나 용산 대통령실은 법을 중단시킬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하면 될 일이다. 요즘 돌아가는 사정을 종합해보면 현 집권세력이 계엄에 대한 ‘의지’는 의심받을지 몰라도 ‘능력’은 없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박근혜 정권 말기와 문재인 정권 시절 계엄준비설과 관련 문건에 대한 논란으로 한때 시끄러웠지만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고민해 본 기억을 가진 시민들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계엄을 상상하거나 걱정하거나 꿈꾸는 것 자체를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전쟁중인 팔레스타인과 월드컵 예선에서 비긴 국내 축구대표팀 감독 홍명보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다.
원래 축구 국가대표 감독에 국내파보다는 외국인들을 더 선호하게 된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숨겨져 있다.
국내파 감독이 등장하면 실력보다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학연, 지연으로 대표팀을 구성한다는 불신이 오래전부터 자리잡아 왔다. 해서 국내 인맥지도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인 히딩크 전 감독이 오로지 실력 하나로 대표팀을 구성해서 월드컵 4강이라는 큰 성과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정부 인사가 특정 학연과 지연 그리고 특정 이념 집단에 지나치게 편중되면 ‘계엄음모론’ 아니라 그 이상의 음모론이 나와도 그런 음모론을 지지하고 퍼트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릴수 없다.
계엄음모론 등으로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일부 야권 세력도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편중된 인사를 계속 고집하는 현 집권세력의 인사관도 이번 기회에 되돌아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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