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독일)=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독일 수도 베를린 시내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문’은 독일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으며 독일 통일과 함께 독일과 베를린의 상징이 됐다.
1989년 11월 9일 약 10만여명의 인파가 이 문 앞에 운집한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다.
기자는 당시 외신부에 근무했었는데 정말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순식간에 통일이 되는 그런 장면을 목격했다.
'전광석화(電光石火)'는 이런 경우를 두고 만들어진 단어가 아닌가 싶다.
독일 통일 과정은 같은 분단국인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감과 상상력을 전달해주었다.
동·서독은 분단 과정에서도 교류를 멈춘 적이 없어 우리나라 대북정책에 ‘남북간의 교류 지속’이 통일의 필수라는 교과서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물론 남·북한은 동·서독처럼 화해의 길을 길게 끌고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독일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6.8세대들은 과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가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트린 대규모 시위 이후 통일 독일에서 이와 비슷한 시위는 뜻밖에도 코로나가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던 2020년에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수 만명이 모인 시위에 독일내 반이민 극우단체 ‘페기다’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독일은 물론 유럽 일대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브란덴부르크문 근처에는 3만8000여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베를린 경찰 당국은 이날 시위대에 '큐어넌'(QAnon)이라고 불리는 극우 음모론 집단이 대규모 참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발표했다. 일부 극우 시위대는 "우리는 나치와 함께 행진하고 있다"고 외치기도 했다.
‘큐어넌’이라고 하면 바로 친(親) 트럼프로 유명한 미국의 극우단체가 아니던가. 그런 단체가 독일 극우단체 ‘페기다’와 뜻을 같이 했다고? 기이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기자가 방문한 8월 어느날,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는 아주 소규모의 시위가 전개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광장에 모인 일반 대중들은 이들 시위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먼저 한무리의 젊은이들은 이색적인 복장을 하고 ‘낙태 반대에 행동하라 그리고 기도하라’는 문구가 적힌 플랭카드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차분하게 시위를 벌였다. 그네들은 주변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그들이 만든 전단지를 뿌리고 있었지만 별 관심을 모으지는 못했다.
신실하게 무장한 종교단체의 시위로 보여졌다.
이들 시위가 끝나자 70대 이상으로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문구를 적은 플랭카드를 늘어놓고 시위를 전개했다. 앞의 시위 때와는 달리 이네들의 시위에는 경찰들이 주변에서 서성이면서 이네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아마도 과격해지는 것을 말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들 노인들이 과격해지면 뭘 얼마나 과격할 것인가.
이들 노인들이 들고 있는 플랭카드에는 이런 문구도 있었다.
“나토(NATO)의 목적은, 미국을 끌어들이고 러시아를 추방하는 것. 그것은 바로 독일이 몰락하는 길이다”
“영국과 미국의 고성능 폭탄은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토지를 강타한다”
이들 시위에 호응하는 군중들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독일내 반부패그룹(Anti-Corruption Foundation)이라는 단체가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독일에서 러시아와 미국의 위상을 엿볼 수 있기는 하다.
가령 “누가 우크라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800명에게 묻자 미국 36%, 푸틴 27%, 나토 15%, 우크라 9%라는 결과가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미국산 장거리 미사일을 독일에 배치하는 문제에 대해 독일 국민들의 찬반 여론도 팽팽하다.
지난 1일(현지시간) ntv방송에 따르면 여론조사기관 포르자가 지난달 25∼26일 독일 시민 1002명에게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49%는 미국산 미사일 배치가 '옳지 않다'고 답했다. '옳다'는 응답은 45%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는 독일 국민들의 복잡한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일련의 여론조사임을 알 수 있다.
나치의 본고장이자 2차 대전 이후 나치 전범재판이 열렸던 뉘른베르크 중심지에서는 “젊은 노동자들과 외주민들의 화합과 전진을 촉구”하는 역시 노인들의 시위가 있었다.
물론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머니 1명이 대표적으로 부지런히 연설을 하고 있었다. 주로 노동관련 정부기관에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제안을 하고 또 성과를 내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일반 시민들의 지지와 관심을 촉구하는 내용들이었다.
문제는 무심한 시민들의 반응이었다.
독일 대도시에서 노인들의 진보적인 시위를 보면서 프랑스 6.8운동에 영향을 받은 독일식 6.8 운동 세력의 흔적을 떠올렸다.
독일의 6.8운동은 나치 청산을 주요 가치로 삼아 반성에서 출발하면서 동시에 억압적인 교육제도 개혁, 가부장적인 사회질서 파괴를 함께 주장했고, 큰 호응을 얻었다.
6.8세대들은 이후 정치권에 진출해 큰 세력을 형성했는데 녹색당이 주요 성과로 풀이된다.
여기에 더해 사민당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사민당은 집권하자 6.8운동 세력의 주장들을 대폭 수용하면서 사회개혁을 진행했다.
동서 냉전의 틀에서 벗어나 동독을 포함해 공산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등 동방정책 역시 이들 6.8세대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독일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세대가 바로 70~80대들이다. 문제는 이네들은 이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듯이 보이고 있고 2024년 독일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세계에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EU 이끌던 독일경제는 왜 기운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올해 2분기 독일 국내총생산(GDP)이 전분기에 비해 0.1% 줄어든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연방통계청이 30일(현지시간) 밝혔다.
지난해 4분기 0.4% 역성장한 독일 경제는 올해 1분기 0.2% 증가하며 회복세를 보이다가 다시 내려앉고 있는 것이다.
독일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을 0.3%, 내년은 1.0%로 전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조차도 달성될지는 미지수가 아닐 수 없다.
경제지 한델스블라트는 “0.5% 이상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지 거의 2년이 됐다”며 “전문가들은 독일 경제가 올해 소폭 성장할 것으로 예측해왔지만 많은 지표를 보면 2분기 이후에도 상황이 개선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때문에 ‘유럽의 병자 독일’이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부유한 자본주의 가난한 사회주의’의 저자로 국내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라이너 지텔만 박사는 최근 언론 기고문에서 이렇게 독일을 진단했다고 한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가 번역해 자신의 SNS에 소개한 글인데 지텔만 박사는 “독일은 다시 한번 유럽의 병자가 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은 3.1%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독일은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0.2%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독일의 기업 파산 건수는 지난 10년보다 더 많다”고 주장했다.
지텔만 박사는 이어 “독일의 경기 침체는 유럽연합(EU)이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등록을 금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더욱 악화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독일은 또한 인구 통계학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는 숙련된 노동력의 심각한 부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인력 부족은 자격을 갖춘 근로자를 찾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가장 단순한 직업에서도 사람을 찾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는 독일 경제가 망가지면서 점점 더 많은 유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독일을 떠나고 있다면서 독일은 5.1%의 이주율로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 관료주의가 더해지는데, 관료주의는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보다 더 나쁘다. 건축 허가는 수년, 때로는 10년 이상이 걸릴 수 있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역대 어느 총리보다 인기가 낮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기가 높았던 녹색당은 점점 인기가 없어지고 있다. 그러나 내년 총선 결과와 상관없이 독일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개혁이 시행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텔만 박사의 독일 경제에 대한 경고를 듣자면 왠지 우리나라 현실과도 무관치 않음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행은 독일 경제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도 제조업 비중과 중국 의존도가 높고 인구 고령화에 따른 노동시장 변화가 크다는 점에서 최근 독일경제 상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진단하고 “우리도 독일의 사례를 참고하여 산업구조를 다변화하고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에 대비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고 밝혔다.
이같은 경제 사정 때문인지 지난 6월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당 (AFD)이 크게 약진을 했다.
옛 동독 지역을 중심으로 극우 독일대안당(AfD)에 이어 최근에는 급진좌파 신생 정당 자라바겐크네히트동맹(BSW)의 지지율이 치솟고 있는 등 그동안 평온을 유지하던 독일 정치가 경제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해서 극단적인 세력들이 급부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일대안당은 특히 과거 2차 대전 당시 연합국의 극심한 폭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바 있는 옛 동독 지역의 드레스덴을 성지로 삼고 있어 시민들 사이의 갈등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지난 5월에는 드레스덴에서 유럽의회 선거 포스터를 붙이기 위해 길을 가던 사회민주당 소속 정치인 마티아스 에케씨가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는데, 경찰 수사 결과 에케씨를 공격한 청년들은 모두 극우정당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독일 대도시 곳곳에서 ‘진보적인 노인들’이 잔잔한 시위를 매일 벌이고 있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을 두고 독일이 꼭 우경화의 길을 가고 있다고 진단할 필요는 없다.
다만 경제가 지금처럼 계속 부진하면 좌우 양쪽에서 극단적인 세력들이 급부상할 수 있고 이같은 현상이 유럽 전체에 미칠 영향도 점검해 볼 시간이 다가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독일이 유럽의 병자가 되는 길은 결국 경제 부진에서 시작해서 좌우 극단세력의 득세로 완성이 될 것이다.
독일이 과연 라인강의 기적과 통일을 가능하게 했던 6.8 운동세력의 유산을 넘어서는 새로운 성취로 나아갈지, 아니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는 퇴행의 길을 갈지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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