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지인들을 만나면 두가지 퀴즈를 한번 내보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맞추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먼저 질문은.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인줄 아느냐?”
그리고 이어서.
“그렇다면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대개 지인들이 답하기를 미국은 적게는 4만달러 수준에서 많게는 6만달러선까지 짐작을 하고, 일본의 경우는 4만 달러 이상으로 답하는 경우가 많았고 낮춰 보면 3만 달러 후반으로 그래도 한국은 압도하는 것으로 대답을 한다.
정답은 둘다 틀리다는 것이다.
5일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제친 것으로 나타났다. 사상처음이라고 한다.
한은은 국민계정 통계의 기준년을 2015년에서 2020년으로 개편한 결과 1인당 GNI가 3만3745달러에서 3만6194달러로 상향조정됐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지난해 1인당 GNI는 3만5841달러로 추산됐다.
미국은 8만 달러 전후수준이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 모두 2배 가량 국민소득이 높다는 것을 실감하는 지인을 만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일본이 한국과 비슷하거나 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드물다.
≠30년만에 뒤집어진 미국과 일본의 명암이 가르쳐주는 것은
35년 전 1980년대 후반 이야기다.
당시 읽은 외신 기사 중 하나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주제는 “왜 일본차는 미국 시장을 석권했느냐”였다.
미국은 땅이 워낙 광활해 100㎞, 200㎞를 달려도 무인지경인 곳이 많다. 그런데 미국 차를 몰고 가면 사람도 짐승도 보이지 않는 그 어느 곳에 차가 딱 멈춰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미국 자동차 산업은 일상화된 노조의 파업으로 공장을 제대로 돌릴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본은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공장 노동자들도 장인 정신에 투철했다는 그런 신화에 여전히 충실했다.
결론은 미국차는 고장이 심해 그 차를 몰고 다니려면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데 일본차는 절대 고장이 나지 않는다는 미국 소비자들의 믿음이 바로 일본차의 미국시장 석권의 비밀이었다.
2차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 연이은 전쟁 특수를 만끽하던 미국 경제가 장기 호황의 끝물에 놀기에 바빴다면 일본은 혁신과 장인 정신으로 무장해 세계경제를 리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일본은 자동차는 물론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1985년에 이미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8000달러로 미국의 1만5000달러를 앞질러 일본 땅을 다 팔면 미국 전체를 다 사도 남을 지경이라는 계산까지 나왔다.
흔히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운운하지만 일본 경제의 거품이 터지기 전에는 일본은 확실히 모든 분야에서 미국 등 선진국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민관(民官)이 일심으로 뭉친 결과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외신부에서 매일 욱일승천하는 일본경제 기사를 썼던 기자는 90년대 중후반 출판 담당 기자로 자리를 옮기자 이번에는 미국 경제가 부활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경제신문에서 주로 취급하는 신간은 경제서적인데 그런 서적 중에 지금까지 기억나는 단어는 4가지 정도가 된다.
‘리스트럭처링’ ‘벤치마킹’ ‘스타벅스’ ‘아마존’ 등이다.
앞의 두 단어는 주로 미국에서 출간된 경영 혁신 책들의 핵심 단어들이다.
‘리스트럭처링’(restructuring)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사업 단위들을 어떻게 통합해 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장기 경영 혁신 전략을 말한다.
당시 미국 기업들은 경쟁력을 되살리기 위해 기존 사업을 재편하고 활발한 M&A를 통해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벤치마킹’(benchmarking)은 측정의 기준이 되는 대상을 설정하고 그 대상과 비교 분석을 통해 장점을 따라 배우는 행위를 말한다. 1979년에 미국의 제록스(Xerox)가 당시 이름도 없던 일본의 캐논 복사기에 밀리자 바로 캐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효시이다.
“일본기업에서 배우자”는 외침이 ‘벤치마킹’이라는 경영혁신 개념을 탄생시킨 것이다.
당시 미국 경영계에서는 이 두 단어를 빼고는 그 어떤 혁신도 말할 수 없었다.
다만 한국에서는 이런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특히 90년대 후반 와환위기를 겪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리스트럭처링’과 같은 개념은 단순히 인력 감축을 뜻하는 구조조정의 의미로만 받아들였고, ‘벤치마킹’은 무조건 잘 나가는 기업들을 베끼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자동차도 아니고 비행기도 아닌 커피를 들고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겠다는 ‘스타벅스’에 관련된 경영 관련 서적들과 그런 책을 서점이 아닌 인터넷에서 팔겠다고 나선 ‘아마존’의 현재와 미래를 분석하는 책들을 읽으면서 “미국은 참으로 특이한 나라이다”는 생각에서 기자는 넘어서지 못했다.
지금 이 두 기업이 이뤄낸 성과를 보면 “혁신이란 역시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는 점을 확실하게 배우기는 했다.
반면에 당시 일본에서는 오래 살아남은 장수 기업들의 비법을 다룬 책들이 많았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혁신 기업이 아니라 장수 기업이다.
일본기업들은 혁신보다는 장수(長壽)를 선택한 것이다.
≠ ‘수퍼 엔저’ 일본의 현주소를 보면서 아베가 쏘아올린 3가지 화살을 생각하다
'유나선생(ゆな先生)'이라는 필명의 일본 누리꾼이 지난 달 12일 'X'(옛 트위터)에 '2024년의 일본'이란 제목으로 올린 글을 한번 보자.
이 글은 1주일 만에 200만회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일본 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그 내용 일부가 국내 언론에도 이미 소개된바 있다.
“오렌지 주스 조차 못 살 정도가 돼 감귤 혼합 주스를 눈물 흘리며 마시게 된 2024년의 일본.
여성들은 외국에 매춘을 하러 너무 많이 나가 미국 입국이 거부되는 일이 속출하고, 그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 훨씬 더 가난했던 한국에 매춘하러 나간다.
한때 무역 수출 대국은 오랫동안 자만해 있었고, 이제는 무역 적자가 수십 조엔에 달해 수출할 것이 없으며, 관광업으로 서양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나 인도, 심지어 이름도 알 수 없는 나라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머리를 숙여 외화를 벌고 있다.
<중략>
사회인들도 최상위층은 차례로 미국으로 탈출하고, 일단 탈출한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도시에서는 일본인이 아파트 임대료를 소유자인 중국인에게 매달 지불하며, 비싸서 부동산을 살 수 없다고 한탄하는 일본인의 옆에서 중국인이 싸다고 아파트를 현금으로 사들이고 있다.
<중략>
금융 정책이나 재정 정책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라고 착각하며 구조 개혁을 미루고 기술 개발을 경시하며 모든 것을 미뤄온 나라와 국민.
과거 현인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 문명 개화로 인한 격변의 역사조차 잊어버리고 쇼와 시대에 영화에 극한, 오래된 이권에 물든 기업이나 조직의 노인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새로운 기술이나 사고 방식을 말살하고, 당사자들은 그 때 쯤엔 죽어서 도망쳐버린다.
삶은 개구리의 배 속에 시한폭탄을 안겨진 젊은이들은 언젠가 외화가 떨어졌을 때, 쇠고기도, 밀가루도, 대두도, 석유도 가스도, 우라늄도, 모든 것을 살 수 없게 되고 황폐해진 사회가 올 미래를 어렴풋이 예측하면서도 그 현실을 외면하고 오늘도 아저씨에게 팬티 색깔을 물어보는 원조교제녀 옆에서 귤주스를 마시고 있다.”
특히 이 글은 일본 여성들이 한국에서 성매매를 하다가 적발되었다는 뉴스가 나온 뒤에 올라왔다. 그 뉴스가 일본에서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 아마도 한국 사람들은 별로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일본 여성이 한국에서 성매매를 하다가 걸렸다는 뉴스를 보면서 지금은 그 이름도 가물거리는 ‘기생 관광’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1972년 일본교통공사에서 발행한 관광 안내서는 이렇게 손님들을 모으고 있었다.
“한국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나라이다.”
이름하여 ‘기생 관광’이다. 이슈로 꺼내기도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 뒤안길에서 서성이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세상이 뒤집어진 것인가?
2013년 아베 총리는 2차 내각 출범 직후 첫 번째 정책 연설에서 '세 개의 화살'을 처음 언급했다.
아베 총리는 시중에 통화량을 늘리는 양적완화, 정부 재정지출 확대, 각종 규제 완화 등 세 가지 정책을 적극 추진해 지난 20년 간 침체됐던 경기를 되살리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세 개의 화살’이라는 말은, 한 개의 화살은 손쉽게 꺾을 수 있지만 화살 세 개가 겹치면 한꺼번에 부러뜨릴 수 없다는 일본 전국시대 사이고쿠(西國)의 다이묘(大名, 영주)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일화에서 가져온 이야기라고 한다.
문제는 세 번째 화살이었다. 세 번째 화살인 성장전략 부분에선 투자촉진을 위해 경제특구를 통한 해외투자 유치, 소매전력시장 자유화 및 원전 가동, 자본 지출과 R&D 투자 확대, 법인세 인하, 건축규제 완화, 의약품의 온라인 판매 허용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게 신통치가 않았다.
일본종합연구소 수석연구원 모타니 고스케는 아베노믹스에 대해 최근 “일본 경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망국 정책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모타니 연구원에 따르면 일본의 명목 GDP는 노다 요시히코 정권이었던 2012년 6조2000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엔저를 유도한 아베 정권 말기인 2019년에는 5조1000억 달러로 약 20% 줄었고, 엔저가 가속한 2023년에는 4조2000억 달러로 3분의 2까지 축소됐다.
“세계가 보는 일본 경제의 존재감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게 모타니 연구원의 결론이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엔화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29일까지 9조7885억 엔(약 86조 원) 규모의 외환 개입을 실시했다.
‘수퍼 엔저’는 원화에도 불똥이 튀기 마련이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주 1380원까지 올라 ‘빅 피겨 1400원’을 넘보고 있다.
물론 원화보다는 엔화가치 하락이 더 가파르다. 때문에 올해 우리나라 1인당 GDP는 일본을 더욱 앞설 전망이다.
구조개혁 그리고 혁신없이 진행된 양적완화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요즘 일본경제를 보면 실감할 수 있다.
30년만에 뒤바뀐 미국과 일본 경제의 엇갈린 운명을 보면서도 한국 경제가 나가야 할 교훈을 찾지 못하고 집안 싸움에만 몰두한다면 일본을 짓눌렀던 갈라파고스 신드롬(자신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이 우리라고 해서 비껴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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