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엔비디아가 22일 장 마감 뒤 압도적인 1분기 실적을 발표한 이후 23일 주가는 9.32% 올라 사상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지난달 마감한 2025 회계연도 1분기 매출은 260억4000만달러로 1년 전보다 262% 폭증했고 시장 예상치(246억5000만달러)도 훌쩍 뛰어넘었다. 엔비디아가 기록한 65%의 영업이익률은 경쟁사들을 압도하는 꿈의 실적이다.
엔비디아는 또 실적 발표와 함께 주식을 10대 1로 분할하겠다고 밝혔다.
엔비디아가 이처럼 축포를 날리기 하루 전인 21일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DS부문장에 전영현 현 미래사업기획단장(부회장)을 위촉한다고 밝혔다. 기존 경계현 사장은 미래사업기획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삼성전자는 이날 인사를 단행하며 “이번 인사는 불확실한 글로벌 경영 환경하에서 대내외 분위기를 일신해 반도체의 미래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며 “신임 전영현 부회장은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와 배터리 사업을 글로벌 최고 수준으로 성장시킨 주역으로 그간 축적된 풍부한 경영노하우를 바탕으로 반도체 위기를 극복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인사를 발표하면서 ‘반도체 위기’라는 표현을 썼다.
미국 저쪽에서는 엔비디아가 ‘축포’를 날리고 있고 한국 최고의 반도체 기업에서는 ‘위기’라는 표현을 쓰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지난해 15조원에 가까운 적자를 내며 최악의 실적을 냈다. IT 수요 전반이 위기적인 상황이기는 했지만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D램 반도체 신기술인 HBM 같은 차세대 시장에서 경쟁사에 주도권을 뺏긴게 치명적이었다.
◇삼성전자 진짜 위기는 공장 돌릴 에너지가 부족해지는 것
기자는 얼마 전 산업단지를 개발 분양하는 사업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깜작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도권 인근에 최근 산업단지 분양을 성공리에 마쳤다. 하지만 너무 힘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땅을 분양받고 입주할 기업들을 찾아나서는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힘든 대목은 바로 전력망 확보였다. 한국전력은 산업단지를 만들면 한전이 전기를 공급하는데 9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자체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전력 확보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이게 우리나라 현실이었다.
공장을 돌리려면 이제 국가 기관인 한전의 도움만으로 되지도 않는다. 기업들 스스로가 자체적으로 전력 공급망을 확보해야 하고 더 나아가 전력을 만들어 자체 공급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전기를 만들어도 보낼 수가 없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강릉에코파워, 삼척블루파워, 삼척빛드림 등 동해안권 석탄화력발전소가 운전하는 8기 모두 지난달 중순부터 전기 생산을 중단했다고 한다.
아무리 전기를 생산해도 수도권으로 전기를 보낼 송전(送電) 선로 건설이 수년째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발전소 인근엔 전력이 넘치고, 정작 수도권에는 전력이 부족한 ‘전력 미스매치’가 한국경제의 고질병이 된지 오래됐다. 송배전 전력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망 구축을 위한 특별법까지 발의됐지만, 처리되지 못하고 폐기될 위기에 처했다.
우리나라 주요 송전선로 건설은 지난 2013년 발생한 밀양 송전탑 사건 이후 곳곳에서 분쟁이 지속되어 사실상 중단된 상태나 다름없이 되었다.
한전은 송전선로 주변에서 암 환자와 가축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며, 세계보건기구(WHO)도 전자계 장기 노출 때 암이 진전된다는 생체 작용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송전선 주변 주민들의 반대는 요지부동이다.
기존 석탄이나 원전 전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4월에는 호남 지역 태양광 설비의 전력 생산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친환경적으로 만들어진 에너지라고 해도 우리 집 근처를 지날 수 없다는 민원이 전국 곳곳에서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태가 예사롭지 않게 돌아가자 지난해 10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발의되었다.
특별법은 622조원 규모의 투자가 예고된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등 국가 첨단산업단지와 발전소를 잇는 345kV 이상의 송·변전 설비를 적기에 건설하기 위한 법안이다.
내용을 보면 전력망 건설 지원 체계를 구축하고, 건설 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인·허가 규제 완화 및 지원·보상책이 담겼다.
특별법이 통과되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전력망 확충위원회’를 만들어 중앙정부가 직접 나서 주민과의 갈등을 중재하고 각종 인허가 절차도 간소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법은 발의 8개월째 국회에 계류 중으로, 사실상 본회의 통과가 무산돼 폐기 위기에 놓였다.
이와 관련 한국경제인협회(이하 한경협)는 회원사를 비롯한 국내 주요 기업들의 의견 수렴을 통해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입법’ 등 ‘22대 국회에 바라는 경제계 110대 입법과제’를 최근 국회 양당에 전달했다고 한다.
한경협은 제안서에서 전력망 구축 지연에 따른 산업 발전 저해 사례도 제시했다.
국내 최대 바이오 협력단지인 송도 바이오클러스터에 전력 추가 공급을 위한 신시흥S/S∼신송도S/S 345kV 송전선로 건설이 당초 계획 대비 5년 지연돼 오는 2028년 12월 경으로 늦춰졌다.
국내 대표 바이오기업들이 송도에 연구·공정개발(R&PD)센터 및 바이오의약품 생산공장 등 투자계획을 발표하며 필요 전력량이 급증하고 있는데 송전선로 건설이 지연되면서 전력 적기 미공급 시 생산활동에 차질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3일 “반도체가 민생”이라며 “26조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종합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메가 클러스터 조성에 필요한 인프라 조성을 빠른 속도로 완수할 것이라면서 “송전선로 건설 기간을 대폭 단축할 국가전력망 특별법이 국회에서 조속히 통과될 수 있도록 국회와의 협의도 강화해 달라”고 관계부처에 당부했다.
윤 대통령 역시 반도체 생태계 조성을 위해서는 송전망 확보가 시급함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전기 없이는 26조원이 아니라 그 이상을 투자한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기 자체도 부족한 판에 친환경 재생에너지 확보도 시급한 과제
AI 기반 데이터센터 확장 경쟁을 벌이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MS)는 탄소 배출 목표를 달성을 위해 주요 공급업체에 2030년까지 100% 무탄소 전기를 사용하도록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MS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넷제로(탄소 순배출량 0)'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MS의 주요 공급업체인 삼성전자, 대만 리얼텍, SK하이닉스 등이 대상이 될 것"이라며 "다만 현재 이들의 탄소중립 목표 시기는 2030년 이후"라고 전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재생에너지로 100% 전환하는 목표 시점을 2050년으로 세웠고, SK하이닉스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전기 사용량을 33%까지 높이기로 한 바 있다.
MS의 요구를 맞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계획이다.
MS는 이번 보고서에서 '무탄소 전기'에 "신재생에너지뿐만 아니라 원전, 바이오매스, 수소, 지열, 탄소포집저장(CCS) 등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급업체들에게는 다소 숨통이 트이는 정책이지만 삼성전자 등은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 첨단 공정에 필수적인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제조 업체인 ASML 역시 최근 공개한 연간 보고서를 통해 “2040년까지 고객 업체를 포함한 모든 생산·유통 과정에서 넷제로를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의 경쟁기업인 대만 파운드리 기업 TSMC는 2050년 재생에너지 100% 달성 목표를 2040년으로 10년 앞당겼으며, 2020년 덴마크 풍력 기업 오스테드와 세계 최대 규모의 해상풍력 전력 구매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대만 정부는 2년 전 재생에너지 비율을 2050년 최대 60%까지 높이는 '2050 탄소 중립 로드맵'을 발표하며 대대적인 재생에너지 육성에 나선 상태다.
이와 관련해 우리 정부 역시 최근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및 공급망 강화 전략'을 발표한 바 있다. 오는 2035년까지 100GW 이상의 재생에너지 설비를 확충하겠다는게 주요 내용이다.
물론 업계에서는 그동안 꾸준히 요구해온 재생에너지 원에 대한 세금 공제 제도는 빠졌다는 불만을 내놓고 있다.
문제는 결국 송전망 확충이다.
처음 석탄이나 원전 발전소 근처에서 시작한 송전탑 반대시위가 재생에너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글로벌 펀드사인 블랙록은 전남 신안군 일대에 손자회사인 크레도오프쇼어를 통해 10조원을 투입해 국내에 초대형 해상풍력 발전단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결국 불발됐다.
아무리 친환경 에너지를 만들어내도 전력을 보낼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전영현 삼성전자 반도체 수장은 앞으로 기술개발이 아니라 국회 앞에 나가 관련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거나 송전탑 반대에 나서는 시위대 앞에서 투척되는 계란 폭풍을 온 몸으로 막아내는 역(逆) 시위에 나서야 할지도 모른다.
관련 법안들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사이,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면 심지어 이런 이야기도 한다.
“동해안이나 남해안 부근에 있는 전기를 수도권에 가져오는 것은 이제 기적에 가깝다. 곳곳의 민원을 해결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차라리 바다를 통해 전기를 옮기는 것이 비용이 적게 들어갈 판이다”고.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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