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HBM3E를 아직 사용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현재 검증하고(qualifying) 있다”
지난 19일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열린 개발자 행사인 ‘GTC2024’에서 전세계 기자들과 Q&A 세션에서 ‘삼성전자의 최신 HBM을 사용하고 있나’는 질문을 받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답변 내용이다.
젠슨 황의 이 한마디로 삼성전자 주가는 급등했고 ‘9만 전자’ 운운의 기대감을 한몸에 받았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엔비디아는 아직 삼성전자 제품을 쓰지 않고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확인해줄 뿐이다.
◇SK 하이닉스가 불지른 HBM, 갈수록 경쟁 격화...‘치킨게임’ 재현 우려도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회사 중에서 HBM(고대역폭메모리)을 만들 수 있는 회사는 셋에 불과하다.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마이크론.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50%, 삼성전자가 40%, 마이크론이 10%였다.
엔비디아는 최신 제품에 SK하이닉스 HBM을 쓰고 있다. 마이크론은 올해 2분기에 나올 엔비디아의 신제품에 자사 제품이 들어간다고 발표한 바 있고, 삼성전자는 젠슨 황의 말 그대로 검증 단계에 머물고 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연결해 기존 D램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성능·고용 제품이다.
젠슨 황은 “HBM은 아주 복잡한 기술로 DDR5과 다른 기적같은 기술이다. HBM은 로직 반도체와 같이 아주 복잡하고 거의 맞춤형 제품일뿐만 아니라 에너지 효율성이 매우 높고 속도가 빠르다”고 격찬했다.
삼성전자는 전통적인 메모리 강자로 군림해 왔지만, HBM에서만큼은 경쟁사 SK하이닉스에 1위 자리를 내줬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12단 적층 HBM3(고대역폭 메모리)를 업계 처음 양산해 엔비디아에 독점 공급하며 HBM3 시장에서 9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SK하이닉스는 더 나아가 5세대인 HBM3E를 가장 먼저 엔비디아에 공급한다.
앞서 마이크론이 HBM3E 양산을 공식화했고 삼성전자도 상반기 중 양산 예정이라고 하지만 SK하이닉스가 업계 선두인 것은 분명하다.
SK하이닉스측은 “AI 챗봇(인공지능 대화형 로봇) 산업이 확대되면서 늘어나고 있는 프리미엄 메모리 수요에 맞춰 시장에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이미 한차례 SK하이닉스에 뒤진 삼성전자는 업계 최초 12단 HBM3E 실물을 공개해 주목을 끌었다. SK하이닉스는 아직 12단 제품은 없으며, 8단 적층의 HBM3E 제품을 이달 말부터 양산할 계획이다. 12단 제품은 삼성전자가 최초로 선보인 만큼, 차별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문제는 모두 엔비디아에 목을 매고 있다는 점에 있다.
엔비디아는 AI(인공지능) 개발 플랫폼 쿠다를 통해 AI 반도체 칩 시장에서 80% 이상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한다. 메모리 기업들의 HBM 개발과 양산 소식은 오로지 엔비디아에 대한 납품이 가능할 때만 의미를 갖는다. 지금 시장구조가 그렇다.
엔비디아에 HBM을 납품하는 것은 HBM 기술력 입증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수익 창출로 이어진다.
SK하이닉스가 제공하는 HBM3E는 엔비디아가 올해 출시 예정인 GPU(그래픽처리장치) H200, B100에 탑재된다. 시장조사업체에 따르면 올해 HBM의 연간 성장률은 적게는 40%, 크게는 60% 이상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젠슨 황이 굳이 삼성전자의 능력을 극찬한 것은 비즈니스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엔비디아 젠슨 황이 삼성전자의 HBM에 승인 사인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HBM 공급처의 다변화를 위한 전략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잘 따져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젠슨 황의 입장에서는 공급처를 다변화해서 경쟁을 유도해야 하고, 그 목적은 오로지 HBM 납품가의 인하에 있음은 물론이다.
어차피 시장조사업체 욜 그룹은 지금 형성된 HBM 가격 프리미엄이 조만간 크게 낮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욜 그룹은 일단 올해 전 세계 HBM 시장 규모를 141억달러(약 19조원)로 추산하면서 5년 뒤인 2029년에는 377억달러(5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욜 그룹은 “HBM 가격은 DDR4 D램에 비해 가격이 500% 이상 높고 범용 D램에 비해서는 6배나 높은 가격대”라고 전제한 뒤 2028년이 되면 HBM이 주류 D램보다 3배 정도 높은 가격대로 내려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욜그룹에 따르면 글로벌 HBM 출하량이 올해 4엑사비트(Eb)에서 4년 뒤인 2028년 28Eb로 7배나 폭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기간 시장 규모가 2.5배 늘어나는 것에 비하면 공급 물량이 넘칠 것이 뻔한 상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엔비디아가 내놓는 블랙웰 아키텍처 기반 'H200' AI칩이 전문가들의 예상했던 5만 달러보다 1만 달러 이상 낮을 것으로 전망된다.
젠슨 황 CEO는 CNBC와 인터뷰에서 “H100 후속 제품이 일부 분석가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낮은 3만~4만달러 사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엔비디아가 AI칩 시장 80%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직접 개발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젠슨 황은 가격면에서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 등의 공급가 하락을 노골적으로 유도할 것이 뻔하다.
최근 삼성전자에 대한 젠슨 황의 화려한 언사는 은밀하게 ‘치킨게임’을 준비하는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엔비디아 외에 글로벌 기업들과의 협업 강화해야 살아남는다
엔비디아의 독주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AI칩 공급 부족 우려와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직접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이미 메타는 지난달 1일 자체 개발한 AI칩을 올해 데이터센터에 탑재하겠다고 밝혔다. 메타는 지난해 5월 자체 설계 칩 'MTIA'를 처음 공개했고 '아르테미스'라 부르는 2세대 칩도 개발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다 나아가 지난 달 한국을 직접 찾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회동한 자리에서 AI 반도체 등 다양한 미래 산업에 대해 논의하고 돌아갔다.
구글 역시 최신 칩(TPUv5p)을 자사의 최신 대규모 언어 모델(LLM)인 제미나이에 적용했으며, 마이크로소프트(MS)도 '마이아 100'이라는 칩을 공개한 바 있다.
챗GPT 개발사 오픈AI의 샘 올트먼 CEO는 지난 14일 샌프란시스코 오픈AI 본사에서 열린 'K-스타트업 & 오픈AI 매칭 데이 인 US' 행사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AI칩을 만드는 데 협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더 나아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AI칩을 제조할 가능성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지난 6개월 동안 두 번을 방문했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답했다.
올트먼 CEO는 AI 반도체 생산을 위해 국내 기업 등과 파트너를 물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AI칩을 두고 엔비디아 등 선발업체와 후발업체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1980년대 미국과 일본 기업 사이의 1차 전쟁, 1990년대 한국, 일본, 대만, 독일 기업의 '치킨게임'에 이어 3차 대전이 발발할 것이라는 경고도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어리석은 치킨게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설령 치킨게임을 벌인다고 해도 최종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요와 공급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절대강자의 위치에 차근차근 접근해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이 처한 정치·경제·사회 환경이 그런 시도를 가능하게 해줄지는 불확실하지만....
이용웅 뉴스웨이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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